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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포교의 본질과 과제불교 2013. 12. 30. 16:52
불교포교의 본질과 과제
김응철(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Ⅰ. 서언
불교포교의 본질은 모든 중생의 해탈과 해탈지견의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탈이란 번뇌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해탈지견은 해탈한 상태에서 세간을 완전히 알고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어 다시 중생계에 회향(回向)하는 것을 말한다.
해탈과 해탈지견에 이르려면 세 가지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을 계정혜 삼학이라고 한다. 계학(戒學)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정화시켜 나가기 위한 공부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계행의 실천을 통해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교화의 첫 번째 과정이다. 정학(定學)은 마음을 닦는 공부이다. 마음의 안정과 행복,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마음의 집중을 통한 번뇌 망상의 완전한 제거가 바로 선정 수행의 목표이다. 그리고 혜학(慧學)은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유의 능력,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성취를 배우는 것이다. 이 계정혜 삼학은 팔정도라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통해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 불교의 포교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르치고 체득(體得)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불교는 2600여 년 전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한 종교이다. 불교는 실크로드를 타고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대승불교 중심의 북방불교를 형성하였고,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등으로 전파되면서 테라밧다 불교 중심의 남방불교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밀교 사상을 바탕으로 티베트 등지로 전파되면서 금강승불교의 전통을 만들었다.
불교 교단의 포교과정은 매우 단순하였다. 해당 국가에 경전을 전해주면 그것이 번역되고 읽혀지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증가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아쇼카 대왕 때 국제포교사절단을 9개 방면으로 파견한 적은 있지만 불교교단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각국에서 불교 교단의 수행자를 초청하거나 경전을 번역하면서 불교를 배워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의 스님들이 주변국에 포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경전을 번역해 주거나 내용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불교의 포교방법은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적, 철학적 사유체계의 전파를 통한 포교이며, 다른 하나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적 포교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은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반면에 민중들은 새로운 종교문화를 접하면서 신심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종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융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큰 갈등 없이 불교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는 불교사상과 철학적 사유체계가 기존의 것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의 유교나 도교는 불교가 수용됨으로써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고자 불교를 공격하거나 배척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것이 심해지면 법난이나 탄압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국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전래되어 국가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1600여년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 당시 한반도에는 도교와 유교, 무속신앙 등 기존의 종교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을 극복하고 불교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이들과 갈등을 벌이는 것 보다 이들을 사찰 안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당시의 스님들은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불교는 부처님을 모시는 중심 전각인 대웅전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을 모셨다.1) 산신각은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반도의 무속신앙을 수용하는 것이고, 칠성각은 점성술을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그리고 독성각은 혼자서 깨닫거나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행공간이다. 또한 이것을 모두 포함하여 삼성각이라는 전각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이들 종교에 융합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정체성과 목적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많은 종교인들이 사찰 내에서 다양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궁극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최근 주요 사찰에서 템플스테이를 실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종교인들이 자유롭게 불교문화를 체험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템플스테이는 포교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불교문화를 이해시키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각 종교들이 화합하고 융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장기적으로는 포교활동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 사찰의 스님들과 신도들은 알고 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속과 불교를 혼동하기도 한다. 무속신앙을 하는 분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무속신앙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속신앙을 불교의 신행방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가 무속신앙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민족 신앙이며, 5천년 이상 지속된 종교 문화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미신으로 폄훼하기 보다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민족 문화적 유산이라는 생각 때문에 섭수해 주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불교적 관용과 섭수의 태도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병립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불교의 경전이 바로 화엄경이다. 화엄의 세계, 화엄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면 우주의 삼라만상 그 자체가 불성이 깃들여져 있으며, 소홀히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만 불성이 발현된 존재인가 아니면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불교의 포교활동은 앞으로도 유지되고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불교 포교의 출발점인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전도 선언을 중심으로 불교포교의 본질을 분석해보고, 포교과정에서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전도선언(傳道宣言)에 나타난 포교적 의미
1. 전도선언의 개요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 가르침)을 설하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도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앞에서 언급한 전도선언은 부처님께서 성도를 이루신 뒤 다섯 비구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법을 전하고, 야사와 그의 친구 50여명에게 설법을 통하여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한 후 하신 말씀이다.
초기불교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형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포교의 원리와 방법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전도선언의 포교적 의미 분석
1) 포교의 이념형 제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불교 교단에서 전개해야 할 포교의 이념형(Ideal Type)을 제시하고 있다. 이념형이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말하는데, 전도선언에서는 불교 포교의 본질과 추구하고자 하는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전도선언의 첫 부분에서 포교의 주체가 누구인가?, 포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정신으로 포교할 것인가? 포교의 대상별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포교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전도선언의 첫 번째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아! ②자, 전도를 떠나라. ③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④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⑤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⑥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① 포교의 주체
전도선언의 첫 번째 시작 어구인 “비구들아”는 포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포교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부처님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 즉, 성도(成道)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45년간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포교활동은 부처님 혼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 하였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포교사는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 즉, 비구(比丘)이다. 여기서 비구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의 대표로서 언급된 것이지, 비구 승가만 포교를 해야 한다고 제한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포교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비구 승가에게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부대중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네 부류의 승가로 구성되어 있다. 출가와 재가의 사부대중은 결국 비구 승가를 통해서 계를 수지하고, 설법을 듣고, 수행을 지도받는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포교의 주체는 비구승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구니와 재가의 우바새, 우바이가 포교의 주체로서 활동해야 할 의무가 면제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교화라는 불교의 목적은 사부대중 모두에게 부촉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대중의 포교활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사찰과 종단을 포함하는 불교 교단이다. 각 사찰은 지역사회에서 포교활동의 장이면서 지원센터이고, 종단은 제도적으로 형성된 법률적 주체이다. 초기 교단에서는 종단적 주체는 형성되지 않았으나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하여, 그리고 수행과 포교방법론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다양한 종파들이 형성되었다.
② 포교의 부촉 : “자, 전도를 떠나라”
부촉(咐囑)이란 분부하고 촉구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모든 사부대중 특히 비구 승가에 대해서 포교의 의무를 부과하고 부촉하였다. 부촉이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실천해야 할 과제임을 천명하는 것을 말한다. 포교활동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출가한 비구, 비구니 스님이나 재가에서 생활하는 우바새와 우바이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이며, 의무사항이다.
다만 포교활동은 전도여행을 통해서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 걸림이 없이 전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출가한 비구 및 비구니 스님들이다. 그래서 비구 스님에게 전도를 떠나라고 말한 것이다. 이 표현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모든 중생들에게 다가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님들이 포교활동을 위해서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을 만행(萬行)이라고 한다. 만행은 일정기간 수행처에서 수행에 전념한 스님들이 수행의 결과를 중생들에게 회향하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이며, 중생교화 활동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는 우기철 3개월간 집중수행을 하고 건기철인 9개월간은 만행(萬行)을 통해서 전역을 다니면서 설법을 하도록 전통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동안거와 하안거를 마치면 다음 안거에 들어갈 때까지 3개월간 만행을 떠나는 것이 수행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수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스님들은 산철결재를 통해서 만행기간에도 수행에 전념하는 경우도 일부 있다.
③ 포교의 궁극적 목적 :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불교 포교의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데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은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의 첫 번째 좁은 의미로 보면 ‘인간중생’을 말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많은 사람”은 육도(六道)2)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을 말한다. 육도에서 윤회하는 모든 중생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교의 궁극적 목적은 육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깨달은 사성(四聖, 성문, 연각, 보살, 불)의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익과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의 이익(利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우치면서 얻어지는 은혜와 행복감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이익은 믿음만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실천의 결과이다. 즉, 믿음이 실천으로 연결될 때 얻어지는 이익이다. 실천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3)
④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 포교의 정신
세상은 중생세간(衆生世間), 즉 탐진치 삼독심과 그것으로 인하여 범하는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계를 말한다. 중생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스스로 존귀하며, 불성(佛性) 즉 깨달음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불쌍하다”라고 생각한다.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면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무량심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말한다. 중생을 향한 자애로움이 한량없어야 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한량없어야 하며, 중생이 기쁜 것이 나의 기쁨이라는 마음에 한량이 없고, 차별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을 갖는데 한량없어야 한다는 것이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이다.
중생을 이익과 행복으로 이끌려고 하는 수행자나 성직자가 분별심과 차별심을 가지고 있으면 포교대상자를 선별하고 차별하게 된다. 또한 포교대상인 중생의 입장이 아니라 교화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중생을 대하게 된다. 그런 마음은 수행자의 본질이 아니고, 종교인이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종교가 차별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종교인이 대상을 차별한다면 이미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면서 사무량심을 바탕으로 하여 이익과 행복을 전할 것을 부촉하신 것이다.
⑤ “인천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 포교의 대상별 목표
여기서 ‘인천(人天)’이란 인간과 천상의 중생을 의미한다. 인간중생은 현세의 인간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중생, 천상중생은 선행의 과보로 천상의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고 있는 중생이다. 천상중생은 사후의 세계에서 도달한 천상의 존재도 있지만 인간중생 중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이익과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존재도 포함된다.
불교에서는 종종 “육도 윤회하는 중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을 말한다. 그러나 본래 부처님께서는 육도 중생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당시 힌두교 혹은 자이나교 등 인도의 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개념이었다. 즉 중생계 삶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상징화시킨 말이다.4) 또한 육도를 돌고 도는 윤회를 부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바는 없다. 다만 당시 인도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개념을 비유의 방법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육도윤회 하는 중생의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차제설법의 한 방편이다. 차제설법이란 포교대상의 근기에 따라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설법포교의 한 방법이다. 부처님의 차제설법은 시(施), 계(戒), 천(天) 의 순서로 종종 설해졌다. 먼저, 탐욕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보시를 설하여 베풂을 실천하게 한다. 다음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악행을 저지르거나 과거의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계행을 설하여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나아가 선행을 베풀도록 이끌어 준다. 그리고 인과의 법을 설하여 현세에서 선행을 실천한 사람은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시계천의 차제설법으로 중생교화가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가 중생교화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불교 포교의 궁극적 목적은 천상에서 태어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여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깨우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후의 세계에 천상을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윤회의 한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보시를 행하고, 계행을 지키고,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것은 연기적 존재일 뿐이며, 인과적 삶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계행의 실천 다음에는 자신의 마음을 닦아 완전한 선정에 들어가고, 올바른 지혜로 정견(正見)을 갖추어야만 윤회의 본질을 알고 그것에 끄달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는 중생계의 모든 사람들이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고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교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⑥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 포교사의 자세
부처님께서 전도선언에서 천명한 포교의 목적은 많은 중생을 교화하는데 있다. 중생교화에 나선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않고 둘 이상이 몰려다니면 중생교화의 목적 이외의 문제들에 휩쓸리게 된다.
소수일 경우에는 서열과 역할을 정하는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사람이 많아질 경우에는 파당과 갈등을 일으키고, 조직화할 경우에는 집단 이기주이에 빠져서 분쟁을 야기 시키는 경우가 많다. 중생교화를 목적으로 포교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나 성직자는 스스로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포교대상자인 중생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수행자나 성직자의 기본적인 윤리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수행자나 성직자가 둘 이상 모여서 세속화하고 정치화할 경우 종교단체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보다는 또 다른 역기능을 만들어낼 뿐이다. 오늘 날 종교조직들이 세속화하고, 권력화하고, 갈등의 해결사가 아닌 갈등의 원인 혹은 매개자가 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수행자나 성직자가 중생교화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복덕과 지혜를 갖춘 종교인으로서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수행자나 성직자가 조직화된 힘으로 권력과 밀착하면 이미 그것은 종교인의 본분사(本分事)를 벗어난 것이다.
종교의 목적은 이해관계의 대립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는데 있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가 아니라 갈등을 없애고 화합을 이끌어 내는 주체로서 제 역할을 다할 때 종교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 행하고 실천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는” 수행자와 성직자들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불교 교단의 시작부터 이 점을 중시하여 “두 사람이 한길을 가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2) 포교의 방법 부촉
①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②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 가르침)을 설하라. ③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④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⑤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도에 떨어지고 말리라. ⑥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① 포교의 단계 :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부처님은 포교의 전체 과정 즉, 중생교화 시작과정, 포교의 성숙과정, 그리고 포교의 완성 단계에서도 “중생5)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반드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달성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처음도 좋고”는 포교의 시작과정에서부터 포교의 여법성, 목적성을 벗어나지 않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법(如法)하다는 것은 법답게, 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포교활동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중생교화라는 포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포교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방편이란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방편이라고 해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진리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그 결과가 반드시 포교대상에게 유익하고 이익 되게 나타나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포교는 목적과 방법 자체가 여법해야 하며, 대상에 따라서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는 표현은 설법의 과정에서 더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부처님의 법을 설할 때에는 처음 말하는 내용이나 중간이나 끝에 말하는 부분에서도 여법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설법의 시작 부분만 들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거두절미하고 중간만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끝 부분만 듣고 설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설법을 듣더라도 진실을 왜곡하거나 왜곡해 듣지 않도록 말할 필요가 있다.
② 설법 방법의 제시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 가르침)을 설하라” 라고 표현한 가르침은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풍부한 예화와 비유 등의 표현 방법으로 중생들이 알기 쉽게 진리를 설할 것을 부촉한 내용이다.
허황된 내용으로 중생을 현혹시키거나 합리적 이성과 정상적 사고방식을 마비시켜 설득하려고 하거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속이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려는 목적으로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생활의 방편으로, 혹은 신도의 수를 늘리거나 재화를 확보할 목적으로 설법을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있다.
불교의 방편(方便)은 목적도 여법하고, 수단도 여법할 때 활용할 수 있다. 방편을 사용한다는 것은 중생에게 다가가서 진리를 전하는 여법한 방법을 도입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라도 중생교화의 의미와 수행자와 성직자로서의 의무와 역할, 그리고 본분사는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강조하신 바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설법포교이다.
③ 설법 내용 : 청정범행의 실천 강조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는 가르침은 설법의 내용이 원만하고, 흠결이 없고, 청정한 범행을 가르치는 내용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한 범행이란 몸과 말과 행동이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은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교만한 마음이나 진리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을 청정범행이라고 한다.
설법을 하기 위해서는 설법자 스스로도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여야 하며, 설법을 듣는 청법자도 청정한 범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신은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청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수렁에 빠진 소”와 같다는 비유가 있다. 수행자나 성직자가 탐?진?치?만?의라는 다섯 가지 거친 번뇌 망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남에게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은 수렁에 빠진 소의 신세라는 것을 모르도 남에게 수렁에 빠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요즘 종교인들 중에는 종교조직의 권위나 절대자를 핑계로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직의 울타리나 절대자의 울타리 까지도 스스로 벗어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것을 금강경의 표현을 빌어서 말한다면 “종교인은 종교인이 아닐 때 이름 하여 진정한 종교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종교의 두터운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의 종교를 종교답게 만드는 힘이 생긴다.
④ 설법 대상의 근기 :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불교에서는 설법포교의 대상을 근기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한다. 상근기의 중생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없어도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고 청정범행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특별하게 가르침을 설할 필요가 없다. 상근기의 중생은 설법을 하지 않아도 설법의 의미를 스스로 파악하고 실천하고 있다. 중근기의 중생은 가르쳐 주면 알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근기의 사람이다. 반면에 하근기의 사람은 언설로서의 설법으로는 효과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면서 행동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이들 중에서 언설로서 표현되는 설법포교의 주 대상은 중근기의 중생이다. 중근기 중생은 설법을 듣고 배우지 못하면 악도에 떨어지고, 설법을 들으면 범행을 닦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중근기의 중생에게는 어떤 포교방법보다도 설법포교가 효과적이다.
⑤ 설법의 효과 : 깨달음으로 인도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라는 표현은 설법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부처님의 법은 특별한 사람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法)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절대자가 만든 것도 아니다. 연기법은 붓다인 내가 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있는 것이다. 나는 다만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뿐이다. 연기법이란 이른 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12)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며,6) 법은 어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법은 누구라도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에 의해 스스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46)
3) 포교의 실천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전도선언의 마지막 부분은 포교의 실천을 강조하며, 상징적으로 포교지역을 예시하고 있다.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는 당시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 교주와 주요 교도들이 모여 있는 핵심지역이다. 우루벨라 세나니가마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교주는 가섭 3형제였다. 가섭 3형제는 장남인 첫째 가섭이 500명, 차남인 둘째 가섭이 300명, 삼남인 셋째 가섭이 200명 등 총 1,000명의 재가 수행자를 거느린 매우 큰 규모의 종교집단이었다.
우루벨라는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을 하신 둥게스와리 즉 전정각산 맞은 편, 그리고 네란자라 강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이다. 여기서 1천 여 명의 조로아스터교도를 교화시킨 부처님은 이들을 데리고 가야지역으로 옮겨갔다.7) 그리고 최초의 대중설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의 설법’을 통해서 1천명의 수행자들을 아라한의 경지로 이끌어 주었다.
이후 산쟈야 문하에 있던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가 문도 200여 명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1,250여 명의 비구 대중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마하가섭을 비롯한 훌륭한 제자들이 불교에 입문함으로써 승가 교단이 발전할 수 있었다.
Ⅲ. 불교 포교의 특징과 과제
1. 불교포교의 특징
불교의 포교활동은 중생이 직면한 괴로움을 해결해 주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단 초기 중생교화 활동은 사성제를 체득하여 아라한의 지위를 성취한 수행자가 그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계천(施戒天) 중심의 차제설법과 계정혜 삼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설법 등으로 법을 전해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계행의 실천을 서원하고 계의 내용을 수지하는 수계의식이 수반된다. 수계는 일반적으로 삼귀의계, 오계, 십선계, 보살계 등의 단계로 이루어진다. 초기불교에서는 오계만을 수지하였으나 점차 확대되었다.
계를 지키는 목적은 섭선법계, 섭율의계, 섭중생계 등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섭선법계는 선근을 증장하기 위해서 계행을 실천하는 것인데 오계의 수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섭율의계는 율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규범을 지키는 것인데 대부분 출가 수행자에게 해당된다. 섭중생계는 대승보살계를 중심으로 중생구제의 원력을 실천하겠다는 서원이다. 섭중생계의 실천이 바로 포교활동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의 포교활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특징은 계행의 실천이다. 스스로 계행을 서원하여 받아 지니고, 삶 속에서 자신이 서원한 바를 그 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포교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경전 중심의 포교이다. 불교의 신행원리와 사상은 각종 경전에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다. 불교의 경전은 초기경전인 아함경8)을 비롯하여 대승불교에서 결집된 수많은 경전이 존재하고 있다. 국제포교에서는 역경 과정 그 자체가 포교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경은 불교를 수용하고자 하는 국가의 왕이나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전개하였다. 포교를 하고자 하는 주체가 전해 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포교과정이 간접적이고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한국불교가 전래된 지 1600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한문으로 된 아함경과 빨리어로 된 니까야가 번역이 완료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교포교의 세 번째 특징은 법회와 설법이다. 불교는 매월 정기적인 법회 모임을 갖고 스님들의 설법을 통해서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게 된다. 전통적인 법회는 매월 초하루 혹은 보름에 이루어졌으며 필요에 따라서 특별한 날을 정하여 법회를 시설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법회가 농경사회의 전통을 고려하여 음력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산업사회 이후의 양력 중심의 일정과 맞지 않는 측면이 생겨났다. 일본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양력 중심의 달력이 정착되었지만 한국불교는 여전히 음력을 고집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불교는 모든 법회와 행사를 양력을 기준으로 거행하면서 산업사회에 빠르게 적응했다. 1900년대 이후 한국불교가 비약적인 발전9)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음력 중심의 법회 일정은 불교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불교포교의 네 번째 특징은 수행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조 500년의 불교탄압으로 사찰은 산중으로 내몰리고 스님들도 도성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경전의 인쇄나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경전을 공부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고려시대에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많은 경전을 보급할 수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사찰은 불교 경전이 인쇄가 아니라 유교 경전을 인쇄하는 인쇄소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선택한 포교방법이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다. 전문 수행자인 스님들은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법을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으로 채택하였으며, 생활 속에서 신행활동을 해야 하는 재가불자들은 기도, 주력, 염불 등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정치사회적 탄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수행불교의 전통이 21세기 명상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꽃피울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한 것은 세상의 무상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포교의 다섯 번째 특징은 의식과 의례 중심의 포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의식과 의례는 집단상담의 원리의 발전과 불교공동체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천도재는 가족이나 집단의 영적 안정과 불교 교육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국행수륙대재와 같은 큰 재의식10)은 지역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49재 의식은 영가의 남은 가족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며, 7회의 의식을 통해서 불교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고 무상과 무아의 원리를 깨우치는 등 신행활동을 배우고 실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와 효과를 고려하기보다 번다한 형식에 집착함으로써 포교효과를 반감시키는 역효과도 나타났다. 재의식의 의미를 모르는 세대들은 의식 참여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재의식 중심의 포교는 초심자를 위한 포교방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2. 현대적인 포교방법의 모색
전통적인 포교방법 만으로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포교의 효과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다양한 포교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필자가 제시하는 불교의 현대적 포교방법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육포교는 의식과 의례 참여를 중심을 신행활동을 하는 불자들에게 불교의 근본교리와 경전의 내용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적극적으로 신도교육을 실시하는 사찰에는 새로운 신도의 유입이 크게 늘고 있다. 따라서 조계종단을 비롯한 각 종단 산하의 사찰들도 신도교육에 적극 임하고 있다. 조계종단의 신도교육은 입문교육, 기본교육, 전문교육, 지도자교육 등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계의 신도교육이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사의 신도교육은 사찰에서 설립하고 종단에서 인가받은 조계사불교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계사의 경우 매년 새로운 신도로 입문하여 입문교육을 받는 불자의 수는 약 2000명 정도 되며, 이중에서 400여 명이 불교대학 2년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 이중 약 100여 명의 신도가 불교대학원에서 2년간 공부한다. 그리고 조계사 불교아카데미에서 각종 문화교육이나 수행프로그램, 자원봉사 등에 참여한다.
둘째, 조직포교는 교육받은 신도들을 중심으로 신행공동체를 만드는 포교방법이다. 교육받은 신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사찰에 소속된 신행단체에서 일정기간 봉사와 포교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조직포교의 원리이다. 최근에는 법등조직, 법륜조직, 법회조직 등 다양한 신행관리조직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찰에서는 신도조직화가 미흡하고 소규모 신행공동체 형성에 소극적이어서 개별적인 신행활동과 포교방법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종교차별 현상에 직면하여 각 사찰에서 신도조직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셋째, 복지포교는 사찰의 인적 물적 자원을 사회복지 발전에 활용함으로써 간접적인 포교기반을 형성하는 원리로 제시되었다. 불교사회복지 활동은 이웃종교에 비하여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10여 년 동안 450여 개의 복지시설을 운영함으로써 대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지포교는 불교계의 복지서비스 활동을 직접적인 포교로 연계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시행을 실천하여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 긍정적 평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사회에서 문화포교는 불교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신행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템플스테이로 사찰의 생활과 습의를 배우며 익힐 수 있는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템플스테이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는 새벽예불, 참선, 다도, 발우공양, 울력, 사찰안내, 대장경 인경, 탁본 뜨기, 선무도, 전통 등 만들기, 녹차제작, 민속놀이, 범패시현 등이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템플스테이 참여자가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다섯째, 수행포교는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을 대중포교에 활용하는 방법이다. 최근 불교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이웃종교인들이 간화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 서구인들이 불교 수행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종의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수행이 보편화된 것은 아니지만 각종 수행을 직접 체험해 보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은 분명하다. 전통사찰에 재가불자의 수행을 지도하는 수행처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길상사를 비롯하여 시민선방에 입방하는 불자와 일반인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안국선원은 수행포교의 성공사례로 손꼽히는 사찰이 되었다. 현재 전국에서 운영 중인 시민선방은 인천 용화선원을 비롯하여 100여개에 달한다.
3. 한국불교의 포교 과제
우리나라 불교계의 포교활동은 최근 비교적 활발해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일부 종단과 사찰에 국한된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포교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인 포교방법이란 1900년대 이후 정착된 의식 및 의례 중심의 포교방법을 말한다. 농경사회의 문화를 많이 반영하고 있는 전통적인 포교활동은 산업사회를 거쳐 고도 정보사회로 발전하는 시대적 흐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계의 각 스님들이 수하고 있는 승복은 거의 500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강원의 스님들이 배우는 경전의 내용은 340년 전에 채택된 교재를 그대로 배우고 있다. 최근 외전을 더 포함시키기는 하였지만 내전 중심의 강원교육에 큰 변화가 없다. 현대 사찰의 건축물들도 천년이 지난 건축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초하루 법회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동안 큰 변화가 없는 것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교계의 전통문화 고집은 포교적 측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다. 또한 전통문화를 유지 보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투입되어야 한다. 문화재 보호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부 사찰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으나 점차 지역주민과 등산객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불교는 요즘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다종교사회의 도래다. 특히 이웃 종교인이나 단체들 중에는 배타성이 강하여 불교를 타도와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차별적 종교인들을 양산하는 경향도 있다. 다수의 사찰들이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또한 불교의 상징물에 대한 훼손도 지속되고 있다. 아주 최근에도 경남의 한 지역에서 천년이 넘은 문화재 석불을 파괴하려는 시도 때문에 마을에 놓여 있던 것을 사찰로 옮겨 보호시설을 한 경우도 있다. 전국의 많은 전통사찰들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방화와 공격에 대비하여 폐쇄 카메라를 설치하고 오고가는 사람들을 모두 녹화하고 지역 경찰서하고는 핫라인을 설치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교는 종교 간의 화합을 이루어내고, 전통문화 유산을 고집스럽게 지켜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후세에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을 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포교의 보다 근본적이 문제는 불교계 내부에 있다. 사찰만 만들면 저절로 포교가 될 것이라는 안이함이 가져다 준 문제이다. 다수의 스님들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수행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다. 열심히 수행하면 포교는 원하지 않아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아직도 팽배해 있다. 그 결과 포교 전문인력을 양성하지 못하였고 배출하는 시스템도 갖추지 못하였다. 조계종을 비롯한 일부 종단을 제외하고는 다수의 종단들이 구성원 교육을 담당할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불교계 전반의 포교역량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불교계의 각 종단과 사찰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한국불교의 세계화이다. 국제적 시각과 안목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포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확산되고 있는 불교수행법들 중에서 한국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된 것은 한국불교의 주요 문헌과 수행관련 연구들을 외국어로 번역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국불교결지대회를 2년에 한번 씩 개최하면서 세계 각국의 불교학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 관련 연구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제공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투입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한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Ⅳ. 맺음말
한국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전통 민족 종교들이 퇴조하고 서양에서 유입된 이웃종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인구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인구의 변화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한 것이다. 이웃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포교성과를 거둔 것이고, 전통종교 입장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몰락한 것이다. 불교는 나름대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이웃종교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여기에 종교가 정치화 세속화되고, 정치인들이 종교를 이용하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종교편향과 차별을 넘어서 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의 우려가 심화되고 있다. 위험수위를 넘어서 임계치를 향하고 있는 종교차별이 본격적인 갈등으로 비화되기 전에 그 고리를 끊고자 하는 것이 범불교도대회이다. 다행히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부 성직자와 단체들이 이에 화합함으로써 종교화합의 토대를 마련하는 성과가 있었다.
종교 갈등은 이웃종교에 대한 무지와 존재가치를 부정하는데서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계도 이웃종교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인식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이웃종교들 또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33인의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으로 돌아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는 자세를 가져주기를 바란다.
좋든 싫든 불교는 한반도에서 1,600년의 전통을 이어왔고, 이웃종교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상당한 종교인구비율을 확보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종교는 유불선의 세 종교가 비교적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 전통을 이제 불교와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의 세 종교가 이어가기를 바란다.
불교에서 포교는 중생구제, 교도화익, 요익중생의 이념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불교는 포교의 주체적 관점이 아니라 포교 대상자의 관점에서 법을 전한다. 그러한 관점이 대기설법, 차제설법의 방법으로 표현된다. 비록 단기간의 성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세생생(世世生生)의 긴 시간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다하는 것이 불교포교의 방법이다. 불교계 또한 변화하는 종교환경에 적응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불교의 본질을 잊지 않고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한 포교활동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습니다.
2. 그 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습니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짐과 짐꾼과 짐을 짊어지고 내려놓는 것에 관해 설할 것이다. 잘 들어라.”
4.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이라고 부르는가? 다섯 가지 집착의 다발을 짐이라고 부른다. 다섯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예를 들어 물질이라는 집착의 다발, 감수라는 집착의 다발, 지각이라는 집착의 다발, 형성이라는 집착의 다발, 의식이라는 집착의 다발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이라고 부른다.”
5.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꾼이라고 부르는가? 사람을 짐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수행승들이, 그를 짐꾼이라고 부른다.”
6.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재생을 가져오고 향락의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이다.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7.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는가?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되고, 포기되고, 방기되어 집착 없이 해탈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8.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게송으로써 말씀하셨습니다.”
9. “짐은 다섯 존재의 다발이며
세상의 짐꾼은 사람이니
짐을 짊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며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안락이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다른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욕심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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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불교 사찰 중에는 신사를 사찰 내부로 수용한 사례도 있으며, 중국불교 사찰 중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나 주요 인물을 모신 사당을 경내에 설치한 사례들이 많다. 이는 기존 종교적 상징을 사찰로 끌어 들인 것이지만 불교가 그것에 동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행생활에 적극적인 불자들은 그 의미와 종교 상징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육도(六道)를 열거해 보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이다. 여기에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을 합쳐서 십계(十界)라 한다. 육도는 미계(迷界)라고도 부르며, 범(凡)이라고도 한다. 성문(聲聞) 이상의 사계(四界)는 오계(悟界)라도 하며, 사성(四聖)이라고도 한다.
3) 앙굿따라니까야 제1권, A2:2:8, "아난다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실행했을 때에는 이런 이익이 예상된다. 자책하지 않고, 현자들이 그것을 보고 칭찬하며, 명성이 널리 퍼지고, 성성한 채로 죽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아난다여, 나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 그것을 실행했을 때에는 이런 이익이 예상된다."
4) 실제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아함경 혹은 니까야에서 육도(六道)의 여섯 가지를 모두 언급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예를 들어, 그리고 비유로써 말씀하신 내용 중에는 아수라가 빠져 있다.
5) 중생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혹은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든 존재를 말한다.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도 중생의 한 부류이다.
6)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탐욕에 들떠 있고, 탐욕에 사로잡혀 있으며, 탐욕에 홀려 있다가 그 탐욕이 장애물이 되어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는 탐욕을 버리게 되므로 더 이상 탐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법은 현실의 삶에서 사실로 경험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증오심을 품고 있거나 삿된 소견에 매달리다가 그것이 자기를 방해하고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증오심을 품지 않게 되고 삿된 소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게 되어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잡아함경 제46
7) 가야(Gaya)는 현재 인도에 있는 도시의 지명이며, 이 지명이 우리나라의 가야의 지명과 동일하다. 가야시는 붓다가야에서 10여 Km 떨어져 있다.
8)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에는 모두 암송되고 전승되었는데 아쇼카 대왕 때 팔리어로 처음 기록되었다. 이 내용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고, 다시 한문으로 번역된 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한글로 번역이 완료되었다. 이렇게 전승된 경전은 아함경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팔리어 경전이 남방불교로 전승된 것은 니까야라고 부른다. 4아함과 5부 니까야가 있다.
9)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0년대 한국의 불교 인구는 약 12만 명 정도로 일본인들의 조사에서 집계되었다. 그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 대부분의 사찰이 파괴되고, 호패법의 실시와 전지 및 시지의 통제로 인하여 스님들이 사찰에 기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또한 억불숭유정책으로 1905년까지 스님들의 도성출입이 제한되면서 서울을 비롯한 도심 지역에서의 불교포교는 더 큰 타격을 받았다.
10) 불교의 각종 재(齋)의식은 베풂의 행사로 삼복전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삼복전은 부처님과 스님들에 해당하는 공경복전, 부모와 스승에게 공양을 올리는 보은복전,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에 공양을 올리는 빈궁복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사찰에 기진된 재화의 사용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끝
출처 : 조계사 포교사회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메모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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