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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불교가 언제 신라에 전해졌는가?
    불교 2013. 12. 30. 16:47

     

     

     

                       불교가 언제 신라에 전해졌는가?

     

    1.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 온 시기를 말할 때 고구려 소수림왕 2372년으로 본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조에“26월에 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佛文을 전하니, 왕은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년에 승려 阿道가 왔다. 52월에 비로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였으며,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를 거쳐하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였다,“라고 하여 고구려와 삼국에 372년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조에 원년 9월에 胡僧 마라난타 가 진에서 오니, 왕이 궁내로 맞이하여 예와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불법이 이로서 비롯되었다. 22월에 漢山佛寺를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들어 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514~536 재위)조에 “15(529) 비로서 불법을 행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불교전래와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것도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의하여 쓴 것인데, 김용행이 쓴 <<아도화상비록>>과는 전혀 다르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2.

     

    신라 법흥왕 15년에

     

    비로서 불법을 행하였다. 처음 눌지왕(417~458) 시대에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니 군민 毛禮가 집 안에 窟室을 만들고 그 곳에 거처하게 하였다. 때마침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을 주었는데 여러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소용처를 몰라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널리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과 사용처를 일러주면서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대단하여 불타, 불법, 승가의 신성과 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 공주가 위독하니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며 맹세를 표하게 하였더니 공주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을 매우 기뻐하며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는 모례를 보고 왕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주며 나는 지금 갈 데가 있다.’하고 작별을 청하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소지왕(479~500 재위) 때에 이르러서 아도(阿道, 我道라고도 함)라는 승려가 시자 3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었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흡사하였다. 그는 몇 년을 머물다 병든 일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3명은 그대로 남아서 경륜을 강독하니 신봉자가 왕왕 있었다.

     

    3.

     

    아도스님의 비문 내용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찬하면서 대부분 삼국기를 참고하였으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내용은 8 세기의 기록인 김대성의 <<계림잡전>>을 참고로 기록하였다. 이에 일연스님(1206~1290)은 삼국유사에서 아도화상비록을 적고 있다. 그 내용의 대강을 알아본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며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제나라 경신(240~248간 사용한 연호) 때 아굴마(는 성임)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私通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아도 다. 아도는 6세에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만나고, 현창스님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19세에 고구려에 돌아왔다.

     

    아도는 어머니 고도령의 권유로 계림으로 가서 왕성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이때가 미추왕(262~283 재위) 2263년이다.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불교 전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라 이를 꺼렸으며, 심지어 그를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아도는 일선현(지금의 군위군 일대로 볼 수 있음) 모례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264년에 성국공주가 병이 깊어 백방으로 힘썼으나 낮지 않아 칙사를 보내서 아도가 긴급히 궁궐로 들어가 공주의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도에게 소원을 물었다. 아도가

    빈도에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으켜 국가의 복을 빌 수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절을 세웠는데 이절이 금교 동쪽의 천경림에 있는 흥륜사 이다(흥륜사는 52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544년에 완성했다고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어 연대가 맞지 않는다).

     

    283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 했다. 그래서 아도는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든 후 그 속에서 자절하였다. 그래서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여기까지가 김용행이 썼다는 <<아도화상비록>>의 간추린 내용이다.

     

            비교하건데

     

                김대문의 계림잡전

                아도스님 비문

    <묵호자>

     

    0 눌지왕(417~458) 때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와서 모례의 집에서 굴을 파고 거처했다.

     

    0 묵호자가 신라 조정에서 이름도 사용처도 모르는 향의 이름과 사용처를 일러주고, 공주의 병을 고쳤다.

     

    <아 도>

     

    0 소지왕(479~500) 때 아도(阿道, 我道)가 시자 3명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었는데 묵호자와 흡사하였다.

     

    0 아도가 몇 년 후 병든 사실도 없는데 죽었으며, 시자 3명은 경문을 강독하니 신봉자가 있었다.

     

    0 이에 이르러 왕도 불교를 흥기 시키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믿지 않으며 말이 많아 난처했다.

     

     

     

    <아 도>

     

    0 고구려 사람 아도가 263년에 신라(계림)에 와서 살았다.

     

    0 아도가 궁궐에 들어가 불교를 전할 것을 청하니 이를 꺼렸으며, 심지어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

     

    0 아도는 일선현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서 숨었다.

     

    0 아도가 중병을 앓는 공주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그 대가로 왕은 흥륜사를 짓토록 허락하여 건립하였다.

     

     

     

     

     

     

     

     

     

    살펴보건 데 김대문의 계림잡전이나 아도스님 비문의 내용이 연도를 제하고는 유사하다.

     

    계림잡전에서는 묵호자와 아도가 등장하는데 시기는 최서 21년에서 최대 83년의 차이가 있으나 둘이 머문 장소와 모습이 흡사하다. 또 두 문헌에서 등장하는 묵호자와 아도가 머문 곳과 행적이 흡사하다. 결국 묵호자와 아도는 머문 곳, 행적, 모습이 서로 흡사하다.

     

    4

     

    이에 대하여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만약 미추왕 때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면 이는 고구려보다 100 여 년이 앞선다. 이때 신라는 아직 문물이나 禮敎가 있지 않았다. 나라의 이름조차 정하지 않은 때이니 어느 틈에 아도가 와서 불법 믿기를 청하였겠는가? 그리고 고구려에도 닺지 않았는데 건너 뛰어 신라에 왔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생각건대 불교는 고구려,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 이르렀을 것이다. 신라의 눌지왕(417~458)과 고구려의 소수림왕(371~384)은 시대가 서로 잇대어 있으므로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 이었을 것이다.

     

    (묵호자의 머문 장소나)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 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이름도 참 이름이 아니고 아도의 또 다른 이름(별칭)이었을 것이다.라는 의경을 밝혔다.

     

    일연스님이 밝힌바와 같이 신라에 불교가 전래한 시기와 전한 사람은 신라 눌지왕 때인 5세기 초에 진에서 고구려에 온 아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법흥왕 시기이다. 그 전까지는 국가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지 못하고 6촌 제도로 인하여 분산되고,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도 고구려나 백제보다 뒤졌다.

     

    신라는 법흥왕 때(520)에 이르러서야 율령을 제정, 선포하였으나 백제는 고이왕 27(260), 고구려는 소수림왕 3(373)에 이미 율령과 공복(公服)을 갖춘다. 신라는 왕의 명칭도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시기도 법흥왕 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며, 그 뒤를 이은 진흥왕(540~567) 대에는 건원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 등 국가의 중흥기를 맞이한다.

     

    5.

     

    4, 5세기 삼국의 전세와 정치, 문화, 제도 등을 감안하여 서로 다른 기록을 비교해 보면 일연 스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아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고구려의 뒤를 이어 5세기 초로 보아야 하며, 부견이 보낸 아도가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들어와 여러 가지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불교를 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 공식적인 국가 승인 이전에 백성들 간에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 운

     

     

     

     

     

    출처 : 조계사 포교사회
    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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