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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의 불교 수용과 이차돈의 순교불교 2013. 12. 30. 16:48
삼국의 불교 수용과 이차돈의 순교
高 雲 전 만 수
불교의 전래
불교가 이 땅에 나타 난지 5백여 년이 지난 시기에 중국으로 전해졌다.
대략 후한(後漢) 시기로 본다. 그때 어떤 교리가 전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때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대승불교가 싹을 틔우고 불상이 조각되는 등 불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미루어 생각하건데 중국에 처음 전래된 불교의 교리는 초기경전(아함경전류)의 내용이 아니었을 가 싶다. 중국은 한나라가 멸망(220년)하고 나서 촉・위・오 등 삼국이 세력 다툼을 벌였으며, 다시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나 서로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형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목적달성만을 위하여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위한 이념이 필요했을 것이고, 백성들은 밤낮 없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에 시달려야 했으니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은 대상을 찾아야 했다. 이 때 관심을 기울이게 된 대상이 바로 불교였을 것이다. 이는 중원 땅에 불교가 흥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 시기로 알려진 4세기 후반의 중국 정세는 매우 불안하여 동진(東晋)・전진(前秦)・전량(前涼)・후진(後秦)・후량(後凉)・북위(北魏)・서연(西燕)・북량(北涼) 등 자고나면 주인이 바뀌는 불안한 형국이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2)이고, 백제는 침류왕 1년(384)이며, 신라는 법흥왕 15년(528)이다. 그러나 실제 이 땅에 불교가 일반 백성들에게 전래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국원왕은 평양성까지 진격하는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때 고구려 사회는 동요하였다. 왕위를 이어 받은 그는 국란극복을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가 필요하였다. 마침 중국의 전진(前秦)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와 불상과 경문을 보내 주었다. 소수림왕은 감사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사례를 하면서 토산품을 듬뿍 보냈다. 374년에는 아도를 받아들였고, 375년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순도와 아도를 거처하게 하였으며, 불교보급에 노력하였다. 뒤를 이은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 진흥에 힘썼다.
백제 침류왕 1년(384) 9월에 마라난타가 동진(東晋)에서 스스로 찾아왔다 왕은 그를 왕궁으로 맞이하여 환대하고, 예와 공경을 다 하였다. 침류왕은 다음해 3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두는 등 불사에 기여하였다.
침류왕의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국가 권력집단의 세력과 토속신앙에 젖어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 이였을 것이다. 역사서에서는 침루왕이 즉위와 동시에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공인하고 불교사원을 세운 후 9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인이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련의 사건에 의해 사고를 당한 듯싶다. 그만큼 국가와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는 통치 이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음을 증명한다 하겠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설 때 불교에서 유교로 통치이념을 바꿨지만 불교의 힘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궁궐 내에서 조차 신봉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신라는 법흥왕 15년(528)에 비로소 불교를 공인하였다. 정부에서 공인하기 전인 눌지왕(418~458 재위) 때에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1)에 왔다. 일선군에 사는 모례(毛禮)가 그를 맞아들여 집 안에 굴실을 만들고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때 마침 중국의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香)을 주었는데 신라의 여러 신하가 그것의 이름과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몰라 사람을 시켜, 가지고 다니면서 어려 사람들에게 물었다.
때마침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일러주면서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대단하여 신성께 정성이 통할 수 있으며, 신성이란 삼보를 이르니 첫째가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佛法)며, 셋째는 승가다. 만약 소원을 이루고자 원하면서 이 향을 사르면서 삼보님께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신라 왕실에서는 왕비가 병으로 위독하였다. 왕은 묵호자를 불러와 향을 사르면서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더니 왕비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은 매우 기쁜 마음에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는 모례에게 왕으로부터 벋은 선물을 주면서
“나는 지금 갈 데가 있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소지왕(479~500 재위) 때에는 아도(阿道, 我道 라고도 함)라는 승려가 시자 세 명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매우 비슷했다. 그는 몇 년을 머물러 있다가 원인도 없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시자 세 명은 그대로 남아서 경과 율을 설하였더니 신봉자가 점점 늘어 많은 수가 되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왕은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여러 신하의 반대에 부딪혀 왕이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이차돈(異次頓, 處道라고도 함)이다.
이차돈은 506년(501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태어나 528년에 순교하였다.2) 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를 허용하지 않아 한탄하였다.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佛力)으로 국운의 번영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할 수 없었다.
법흥왕의 의중을 헤아린 이차돈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된 도리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옵니다.” 하며
“소신이 책임을 지고 불사를 시작할 것이니 차후에 저에게 책임을 물어 저의 목을 베십시오.” 하니, 임금이 차마 그리할 수 없다고 하자 이차돈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身命)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하여지면 부처님 해[佛日]가 중천에 오르고, 임금님의 길이 편안할 것이옵니다.”하고 비장한 각오를 임금님께 아뢴다.
이차돈은 마침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소문이 서라벌에 널리 퍼져 신하들의 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몹시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위기를 느낌 임금은 자기가 내린 명령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차돈을 불러 들였다.
궁중회의에서 이차돈은
“불사를 일으켰음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소신이 한 일이옵니다. 불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에 유익할 것이니, 국령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신하들의 반대가 극에 달하였다.
이차돈이
“청하옵나니, 소인을 베어 중의(衆議)를 정하십시오.”하니,
왕이
“도를 일으키자는 것이 근본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오.”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기를
“만일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습니다.”하였다.
왕은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이 문제를 논의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지금 보면 중은 머리 깎고 기이한 옷을 입고 있으며, 의론이 기괴하여 상도에 어긋나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놔둔다면 후회가 있을 것이옵니다. 신 등은 비록 무거운 죄를 받는다고 하여도 감히 전하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이차돈이 말하기를
“지금하신 말씀들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다음에 비상한 일도 있는 것입니다. 듣건 데 불교는 그 교리의 깊이가 심오하다고 하니 불가불 믿어야 될 것이옵니다.”하였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깨뜨릴 수 없는데 그대 홀로 다른 말을 하니 형편을 다를 수가 없다.”하고는 드디어 형리에게 죽이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법을 위하여 형을 받으니 만약 부처님이 신령스러우시다면 내가 죽은 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오.”한다.
드디어 이차돈의 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목을 비자 피가 솟는데 피의 빛이 붉은 빛이 아니고 흰빛 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다시는 불교의 공인이나 불사에 대하여 이의를 내는 신하가 없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해에 나라 전체에서 살생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법흥왕은 비로소 불교를 중흥하는데 앞장섰다.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
고대국가가 형성된 초기부터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존재를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차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든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든가, 알에서 나온 신이한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백성위에 군림하였다. 그러나 힘없는 백성들은 집권자의 착취대상이 되면서 천둥치고 벼락을 때리며,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비를 내려 보내 사람을 해치는 하늘이 무서워서 마음이 불안 할 때는 하늘을 향해 빌었다. 북쪽 하늘에 나타나는 칠성별이 우주의 제왕이라고 믿으며 안녕을 빌었다. 그런가 하면 경외 서러운 고목, 큰 바위, 산천 등 자신의 힘보다 절대 강한 대상에게 자신을 맡기고 안녕을 빌었다.
이런 무속(巫俗)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불교가 들어와 가치의 혼란을 겪는다. 하늘의 아들이 인간으로 환원되고 누구나 자신이 한 행동과 생각, 말에 따라[業] 결과가 나타난다는 불교사상 앞에 집권자들은 기득권의 침해에 따른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귀족집단으로부터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왕은 입장이 달랐다. 왕은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으며, 절실한 과제였으므로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여 이를 기회로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기하고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불교 도입 이후 불과 20여년 만에 광개토대왕이 나타나 고구려 역사상 최강의 나라를 운영하였으며, 백제는 왕씨 교체 후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고,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통한 왕권강화 이 후 병부설치, 율령 반포, 백관의 공복제(公服制) 채택, 상대등제 실시 등을 단행하여 사실상 신라의 삼한통합의 기틀을 다졌다.
초기에 전래된 불교교리는?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된 처음의 불교교리는 아무래도 초기경전에 있는 교리가 아니었을 가 생각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에서는‘부처님 법을 숭앙하고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고구려 고국양왕(391), ‘절은 복을 닦고 죄를 사하는 곳’(修福滅罪之處) 정도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전륜성왕 사상과 미륵사상도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초기에 전래된 불교의 중심사상은 인과화복(因果禍福)사상과 기복(祈福)사상 이였을 것이다. 업인과보사상(業因果報思想)은 불교가 흥기할 무렵 인도에서 바라문교의 사성제도를 강력하게 부정한 대표적인 사상 이였다.
미루어 생각하건데 왕권을 쥔 왕은 전륜성왕을 자기와 견주어 백성들을 통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고[불즉왕(佛則王), 백성들은 선업을 쌓으면 즐거운 결과를 얻어 천당에 가서 편안하게 살수있고, 악업을 지으면 다음 생에 지옥으로 떨어져 모진 고통을 당한다고 굳게 믿고 자기와 가족의 복을 빌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교리인 유식(唯識)이나 공(空) 등은 이 후 삼국의 승려가 중국에 유학하여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업인과보사상과 미륵사상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본다.
불교의 첫 순교자 이차돈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순교(殉敎)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불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누누이 가르치고 있으나, 실제 포교활동은 미흡한 편이다. 인도에서 오늘과 같이 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쇼카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쇼카왕은 불탑을 다수 건립하여 후에 대승불교의 탄생과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고, 동인도에 국한 되었던 불교를 남인도, 서북인도는 물론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에도 전파하여 불교 발전의 기반을 만들었다.
앞에서 기술한 신라에서는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이 매우 드라마틱(dramatic)하다. 신라는 건국초기부터 6부(6部)라는 여러 세력 집단이 창건한 집단권력체제였으며, 왕은 상징적 존재였다. 그래서 왕씨(王氏)가 여러 번 교체되면서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세력이 국가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6세기를 맞이하면서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국가체제가 완전하지 못하고 권력이 분산되어 국가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고 왕권이 권력집단을 누를 필요가 있었다.
법흥왕은 성골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권력체제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기존 권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이때 불교 공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새로운 이념을 도입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왕과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집단과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이 대 신하 이차돈(異次頓, 處道)이 불교진흥과 왕권옹호를 위하여 불교공인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골 보수 세력들은 완강하게 반대하여 자칫 왕권이 위협받을 처지가 되었다. 위기를 알아차린 왕은 이차돈을 사형시키라고 명을 내린다. 여기에서 사전에 왕과 이차돈 사이에 내약(內約)이 있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이는 후세들이 역사를 편찬하면서 승자의 편을 들어 왕권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방략(方略)이 아니었을 가 한다.
죽임을 당하게 된 이차돈은 태연하게 말한다.
“나는 법을 위해 형을 받으니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我爲法就刑 佛若有神..........).”3)는 말을 남기고 단두형(斷頭刑)을 받는다.
그 뒤에 나오는 피가 흰색 이였다는 설화는 후에 각색되어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전해져 온다고 하여도 이차돈이 사형을 받게 된 입자에서
“나는 법을 위하여...........”라는 대목에는 유의해야 한다. 일부는 여기에서 ‘법’을 신라가 가지는 국가법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차돈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법›을 믿고 윤회사상을 숭봉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형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차돈은 이 말에 이어 바로 ‹만약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하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불법의 위대함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죽임도 여여(如如)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차돈은 불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 이다. 이차돈 순교 후 신라는 불교가 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라는 통합된 힘으로 국가를 발전시켜 결국 삼한을 통합하는 역사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불교순교자를 높이 기려야 한다. 경주에서는 물론 전국의 사찰에 이차돈 순교비(殉敎卑)와 탑(塔)을 세워 그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야 한다.
<참고한 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인물대새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익진 한국의 불교사상. 역사문화 수첩(역민사). 기타 논문.
출처 : 조계사 포교사회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메모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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