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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화선 중흥을 위한 대선사 법회<2일째 혜국스님>불교 2013. 5. 2. 16:21
간화선 중흥위한 대선사 법회 두번째로 25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혜국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이 법문하고 있다. “화두는 내 마음 보여주는 길, 그 씨앗이라도 심어라
내 마음 추슬러 삼매의 길 가도록 참선법 화두 이어준 수좌가 보물“
인류 역사상 학문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그러나 내 마음을 내가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길들여 와서, 기계문명이라는 엄청남 편리함으로 인해 게임중독 묻지마 폭력 등으로 황폐화된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 고집멸도 등으로 인류의 고통은 집착임을 가르치셨다. 집착이란 내 죄업을 따라가는 것이라서 그림자를 따라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죄업이 없다고 보고 집착에 대해 애초부터 없는 것을 집착이라 해 끊으려는 것을 경계했다.
간화선은 여기서부터 짚고 들어가야 한다. 조사선 간화선에서는 고집멸도도 집착 때문이다. 죄업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밖과 안 두 벽을 허물어 버리고 연기법 자체로 공(空)의허공성이 대자유가 되는 그 법으로 들어가 보자.
어제 밤 조계사는 깜깜했다. 서울도 시골도 깜깜하다. 태양이 석양에 저물어 깜깜한 것이 아니다. 태양은 한순간도 끊어짐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해는 분명히 비추는데 왜 깜감하냐. 태양은 한 찰나도 숨은 일이 없이 24시간 무한 광명을 비추고 있다. 광명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가 등을 돌려서 태양광명과 반대로 등을 돌린 것이다. 오늘 지구가 한 바뀌 돌아 태양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어둠이 없어졌다.
어둠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죄란 어둠이고, 죄도 흔적도 어둠도 없는 것이다. 어둠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환한 것도 없다는 것이 간화선이다.
모든 모양은 감정을 따라 보는 것이다. 마음과 정신, 육신이 나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따라 하나이며, 본래 부처로서 존재하는데 왜 죄업 속에서 갇혀있는가.
원래 고통이 내 죄업에서 일어남으로 본래 마음에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그 스승이 이 영원한 보배이다.
간화선 법을 만나 간화선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란 근본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한국으로 전해진 것은 행운이다. 다만 불행은 개화기에 일본이 세계화에서 앞서 일본불교의 세계화로 나갔고, 티베트가 나라가 없어져 스님들이 세계 각국으로 떠나 국제화된 반면, 우리 간화선은 한참 세계화 과정에서 일본 침략으로 정신문명이기를 못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국력이 약해 세계화에 눈을 띄지 못했다.
오직 긴 마음 법 하나 놓치지 않으려 불법의 맥을 이어오는 지금이야 말로 간화선이 세계화로 나가고 있다. 유엔사무총장 세계은행 총재 등 빅3가 한국인이 진출해 한국의 기운을 엄청나게 뻗치고 있다.
간화선법이 한국에 내려온 보배 중의 보배로 빛난다. 마음속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계사 법당은 허공이고 다른 어떤 것은 허공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과 같다. 전체 허공 그것에 기둥을 세우고 위치에 따라 명칭이 달라 질 뿐이다.
우주 연기법으로 법신이 둘이 아닌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밖과 안의 벽만 허물어 버리면 부처님의 꽃을 가섭스님이 이해한 것이나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법문을 구름잡는 소리로만 듣지 아니하고,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 체험해서 내 인생을 해결하는 법을 알게 된다.
왜 이해의 문제로 진리를 끌어내리려고 하는가. 잘못 익혀 놓은 습관은 언제가 이겨내도 이겨내야 한다. 이는 불교의 업이다. 업의 무게를 느낄 줄만 안다면 그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그렇게 정법을 믿어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이런 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생각의 한계가 끊어지므로 행복이 온다. 다음 생에도 내가 한국에 태어나길 원하는 것은 간화선 때문이다.
고봉스님은 ‘오직 화두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로 참구하라’고 말했다. ‘공부하고 공부하여 생각이 머무를 데 없는 것에 문득 내 마음 깨달아 화두를 타파해야’ 함을 말하고, ‘실답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
공안참구를 바다의 파도에 비유해 보자. 파도는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고 없는 양변이 없어짐은 부처님은 허공성이라 했다. 여기서 중도란 정견을 바로 보는 것이고, 파도는 번뇌이며, 바닷물과 파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렇다면 파도는 있는 것으로 봤을까, 없는 것으로 봤을까.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모든 원인은 무멸이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말씀했다. 간화선에서 파도는 바닷물의 마음 고향 그 자리 하나이고, 바람에 따라 모양만 달라진다. 번뇌는 파도처럼 내 마음의 잘못된 변형이다.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은 그 바람만 끊어버리면 된다. 자기마음을 깨달을 수 없을 때, 그래서 화두가 중요하다.
왜 닦는가? 본래 부처인데 왜 닦는가. 거울이기에 닦는다고 했을 때, 더러운 것은 거울이 아니라 습관이며, 잘못된 습관을 닦는 것이다. 부처이기 때문에 익혀놓은 습관을 닦는 것이다.
‘이뭐꼬’ 화두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 오직 모를 뿐이란 순수성 청정성에 바로 다가가는 것이고, 중생들이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의정을 일으켜서 공안으로 본래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다. 조주선사의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까닭?’에 대한 ‘뜰 앞의 잣나무니라’란 대답은 생각이전을 보여준 참 마음의 정확한 표현으로, 아름아리에 놀아나지 않게 하고, 본참 공안이란 일체 중생들을 위해 바로 우리 마음을 보여주고 근본윤회를 깨달아, 적당한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태고스님 말씀을 옮겨본다.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미묘해, 말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분별심을 화두 일념으로 참구하여 반드시 깨닫게 된다’고 했다.
왜 한국에 도인이 안 나오는가. 화두 참선법은 내 생각을 따라 가서는 참나를 찾을 수 없음을 일깨운다. 자신이 이해하는 화두 참선은 과거에 믿음이고, 알음알이로 인해 발심이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심에 대해 동산스님이 위산스님을 찾아가 참나를 찾는 공부를 보자. 위산스님은 무정설법(無情說法)으로 그냥 보여줬다. 그냥 죽비를 든 엣 스승들은 확 막히도록 가르침을 줬다. 원래 부처님 경전마다 모두 무정설법이라서, 중생은 업력의 노예이며 감정의 노예라서 확철히 깨달도록 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부처임을, 오늘 그 자리 청정으로 돌아가는 연기법을 수행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 마음 추슬러 삼매의 길을 가도록 참선법 화두를 이어준 수좌가 보물같은 분이다. 화두는 내 마음을 보여주는 길이다. 여러분들은 그 씨앗이라도 심어 달라
출처 : 조계사 포교사회글쓴이 : 서림 원글보기메모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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