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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4) 녹취불교/천수경 2014. 11. 5. 16:57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4)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개법장진언 (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 (3번)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啓請)
계수관음대비주 원력홍심상호신
稽首觀音大悲呪 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
千臂莊嚴普護持 千眼光明遍觀照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라,
내가 이제 듣고 보고 얻어 받아 가지게 됐다, 받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걸, 만나기 어렵고 귀중한 것을 내가 이제 듣고 또 보고 받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은 그것은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다,
오직 원하옵나니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게 해 주십시오,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불법은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이제 내가 할 일은 여래의 진실한 뜻,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일, 이것이 제일 우리에게 놓여진 급선무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불교를 안다고 하고 또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고 이런 저런 불교에 깊은 인연을 맺은 분도 계시겠습니다마는 참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뜻 그것이 무엇인가는 우리가 자신있게 무엇이다 라고 이렇게 참 대답할 길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마음 속에 꼭 담아둬야죠. 여래의 진실한 뜻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알기를 원한다 하는 그러한 과제를 우리 마음 속에 담아 둬야 되리라 믿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다시 말해서 법장을 열면서 거기에 대한 어떤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그런 게송이죠. 불교의 소중함, 또 그것이 나에게 오게 된 그런 이야기, 또 앞으로의 나의 소망,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 속에 다 사실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과거에 이러이러한 일로 나에게 왔고 또 그것을 나는 잘 알기를 원한다, 이런 식으로 돼 있죠.
불법의 소중함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경전 도처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뭐 저 보현행원품에도 법공양이 제일이다, 온갖 부처님께 이바지하는 공양이 있는데 그 공양 중에서 법공양이 제일이다, 그건 뭐겠습니까. 법공양이란 다름 아닌 가르침입니다. 불법입니다. 법대로 여법히 이해하고 여법히 수행하는 것, 이해한대로 수행하는 것. 이것이 법공양이다 해서 법공양이 그 어떤 공양보다도 우선이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법의 중요함을 표현하는 이런 말이 또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아주 오랜 세월을 지내고 또 부처님을 받들기 위해서 내가 부처님이 깔고 앉는 그리고 또 깔고 누워 주무시는 그런 평상이 돼 가지고서 또 그 평상이 아주 호화롭고 커서 삼천대천세계만한 그런 훌륭한 거대한 평상이 돼서 부처님을 모신다 하더라도,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만약 법을 알고 부처님의 법을 알아서 법을 또 전해가지고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은 끝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또 부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한 그런 시가 있죠. 그것을 이제,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변삼천(身爲床座遍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미진수겁을 지나고 몸은 부처님의 앉은 자리가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어도 불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네)
라고 하는 그런 시입니다마는, 그와 같이 부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또 부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법을 모르고, 법을 제대로 이해해서 남을 가르치지 못한다면은 아무 쓸모가 없다, 부처님의 은혜는 끝내 갚을 길이 없다 하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오늘날 사실은, 우리에게 ‘부처님, 부처님’ 하고 오늘날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요함도 바로 부처님의 그 존경(?)을 우리가 높히 사는 것도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고 그분이 가르치신 법 때문에 사실은 ‘부처님, 부처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이야말로 부처님의 생명이고 또 불교의 생명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많이 읽는 금강경에도 보면은 그 금강경의 공덕을 매우 높이 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목숨을 희사한, 목숨을 희사를 해도 한번이 아니라 수 천만번 이 내 목숨을 버려서 남을 건진 그런 어떤 공덕보다도 이 금강경의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남을 위해서 수지, 독송, 서사, 또 이해한 대로 해설하는 것, 그것이 공덕이 훨씬 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또 뭐 우주만한 어떤 칠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칠보를 남을 위해서 희사를 했다 그랬을 때 그에게 돌아오는 공덕과 또 그에게 부어지는 찬사와 칭찬 이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금강경의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걸 남을 위해서 해설해 주는 그 공덕과는 비교가 안된다, 천만분의 일도 안된다. 앞서 말했듯이 목숨을 희사를 한 공덕보다도 훨씬 더 천 배 만 배 수승한 것이 법의 공덕이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생명, 불교의 생명은 법이라고 하는 것을 도처에서 우리가 알 수가 있죠. 그래서 법의 중요함을 우리는 이러한 구절에서 잘 명심해야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를 하고 또 이해한 대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면은 사실은 부처님의 마음에 맞는 공양을 올려야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런 표현을 가끔 하는데, 부처님의 식성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손님을 대접했을 때 그 손님에게 잘 대접하는 길은 그 손님의 식성을 알고 그 식성에 맞춰서 대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대접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부처님을 위하고 부처님께 기도 올리고 공덕을 지을려면은 부처님의 식성을 잘 알아서 부처님의 마음에 맞는 공양을 올리는 것, 그것이 제일 그야말로 공덕이 되리라고 생각이 들고 또 부처님이 제일 좋아하시리라고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했을 때 과연 부처님의 식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법공양이다, 부처님은 무슨 다른 어떤 공양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법공양을 좋아하신다. 그건 스스로 당신이 밝히신 그런 내용입니다.
도처에 어떤 그런 그, 향 공양, 꽃 공양, 음식 공양, 무슨 과일 공양, 물론 다 좋은 공양이고 참 우리가 이 가을에 곡식이 났을 때 그 곡식을 먼저 부처님께 올리는 그런 갸륵한 마음이야 참으로 훌륭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경전에서 밝힌 공양은 그 공양보다도, 나에게는 법공양이 제일이다,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것이 무엇보다도 부처님을 이해하는 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해서 이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고 또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의 법을 바로 알고 법을 바로 앎으로 해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고 불교를 바로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길을 불교적으로 또 어떤 깨달은 안목으로 열려있는 눈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펼쳐간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불교공부를 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죠. 그럼으로써 법을 통해서 불교를 알고 또 법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질을 높힌다 하는 그런 뜻으로 이해해야 될 줄 믿습니다.
(다음 방송분)
불교는 이 법, 가르침이 없다면은 불교라고 할 까닭이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불교의 생명은 가르침에 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해야 되는 것, 그것이 또한 부처님께 바로 공양 올리는 길이다, 이렇게 살펴 봤습니다. 또 우리가 이런 경전 공부 시간을 갖는 이유도 바로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의 올바른 사상을 우리가 공부하자는 것이고 또 그 사상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바람직하게 펼쳐보자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개경게에서 살폈듯이 법장을 여는 진언이 되겠습니다. 법장(法藏)이라고 하는 건 법의 곳집, 진리가 또는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그런 어떤 창고의 문을 연다, 법의 창고의 문을 여는 진언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죠. 그건 우선 우리가 쉬운 이해의 길로서 경전을 우선 눈으로 읽기 위해서 경전을 펼쳤다, 펼쳤을 때 그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가,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가. 이것이 ‘옴 아라남 아라다’ 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입니다.
경전을 펼친다, 또 경전을 펼치고 우리가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 라고 하는 말은 온 우주 만유가 바로 경전이고 진리가 담겨있는 그런 진리의 현행이라고 보았을 때 또 그 우주 만유의 하나 하나에 우리가 제대로 눈을 뜨는 그런 길 또 제대로 사물에 눈을 뜸으로서 법을 깨닫고 법을 이해하는 그 방법 또 그 자세, 그것도 역시 ‘옴 아라남 아라다’ 다, 이렇게도 이제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단순한 해석으로는 경전을 펼치는, 종이로 된 경전을 펼쳤을 때 바람직한 자세,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 있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 해당되는 자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수는 나무를 다듬는 일에, 또 소를 먹이는 목동은 소를 먹이는 일에 아주 그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일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일하는 바람직한 자세, 뭐 이런 것들도 역시 경전을 펼쳤을 때의 바람직한 자세나 조금도 다르지는 않다, 이렇게 보아집니다.
‘옴’ 은 앞서 설명했듯이 극찬하는 뜻과 또 온갖 법문의 어머니 또 온갖 진언의 왕이고 또 온갖 우주 삼라 만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남을 항복받을 때 섭복의 의미도 있다, 이렇게 저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에서 살펴보았죠.
‘아라남’ 이라고 하는 말은 무쟁삼매라고 하는 뜻입니다. 무쟁삼매 (無爭三昧). 다툼이 없는 삼매다. 다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한 마음이 됐다, 갈등이 사라졌다. 갈등이 사라졌다는 말은 번뇌가 없다, 번뇌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무쟁이예요. 마음 속에서 이것 저것에 대한 분별이 없다. 오로지 하나만, 통일된 의견 그게 무쟁이고 통일된 정신상태 그것이 무쟁삼매입니다. 갈등이 없고 번뇌가 없는 다툼이 없는 그런 어떤 삼매 그것이 ‘아라남’이다.
그러면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경전을 펼쳤을 때 오로지 경전에만 마음이 가 있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다라고 하면은 오로지 화두 거기에만 마음이 쏠려있지 딴 생각은 없다 하는 말이고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는, 오로지 그 일에 철저하다고 하는 철저히 그 일에 충실한 그런 자세, 이게 ‘아라남’입니다.
그 다음에 ‘아라다’는 만족이라는 뜻인데요, 그런 무쟁삼매 속에서 만족한다, 뭐 그 이상 경전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어떤 일이든지 일의 여하를 막론하고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을 충실히 하는 자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무쟁삼매 속에서 무쟁삼매의 법열 속에서 만족하리라, 이런 뜻이 ‘아라남 아라다’ 다, 이렇게 이제 해석이 됩니다.
그렇다면은 법장을 열고, 경전을 펼치고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되어지이다, 그게 진언 아니겠습니까. 뭐 말로만 외우는 것,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계속 ‘옴 아라남 아라다’ 만 한다면은 그것은 진언이 아니죠, 진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살펴봤을 때 참으로 모든 일에 대해서 정말 진언다운 진언으로 어떤 갈등과 망상, 번뇌가 없는 일념, 일심이 된 그런 상태, 이것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참 우리가 경전을 펼쳤을 때 참 좋은 자세, 바람직한 자세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 구절이 이제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일반적으로 그렇게 읽는데 ‘대다라니 경’ 하면은 이제 천수경의 구체적인 이름이 됩니다. 그건 이제 전 시간에 말씀을 드렸죠.
다시 한번 간추리면 천수천안,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아니 불교의 자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현실적으로 숫자가, 손의 숫자가 또는 눈의 숫자가 천 개다 하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자비, 또는 불교의 자비라고 하는 그 자비사상은 참 불교의 꽃이고 그것은 천 개의 손으로도 부족하고 만 개의 손, 억만 개의 손과 억만 개의 눈으로도 사실은 그 표현이 부족한 것이 불교의 자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이렇게 상징한다, 이렇게 다시 이해해 주시고,
그 다음 관자재, 우리 중생들의 아픔을,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는, 보살피는, 그 보살핌이 자유자재한 보살, 그런 뜻입니다.
광대원만하다, 넓고 크고 아주 원만하고, 그리고 걸림이 없는 그런 대자비심. 우리는 자기 자녀들에게는 사실은 정말 헌신적입니다. 아무 댓가 없습니다. 무엇을 바치고도 아무런 조건도 댓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가 있다면은 그것은 조건과 댓가,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의 태도에 따라서 기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뭐 말 한 마디만 베풀어도 그렇고 조그마한 물질만 베풀어도 그런 조건이 따릅니다. 그것은 넓은 자비가 아니고 큰 자비가 아니고 또 원만한 자비가 아니고 걸림이 없는 자비가 아닙니다. 불교의 진실한 자비는, 관세음보살의 진정한 자비는 그런 어떤 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모든 자녀가 내 자녀처럼 모든 노인이 우리집의 노인처럼 그렇게 생각이 드는 그런 자비고 온갖 사람들을 다 간난 아이 돌보는 그러한 심정으로 중생들을 돌보는 그러한 마음이 원만 무애한 그런 그 대자비심, 이렇게 이제 생각할 수가 있죠.
그러한 사상을 담은 대다라니, 다라니다, 그런 뜻입니다. 대다라니경이다, 이게 이제 구체적인 경전의 제목이죠. 큰다라니다 이말입니다. 다라니는 뭐 진언, 주문, 다라니가 같은 뜻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죠. 좀 내용이 길다고 해서 아마 大 자를 붙힌 것 같고, 또 이 大는 존칭으로서 大 자를 붙히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계청(啓請)’이라고 하는 낱말이 있는데 이것은 열어서 청한다 하는 그런 낱말로서 대개 보면은 이건 괄호를 해 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법문이 아니예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계수관음대비수…’ 이렇게 해서 염불의 한 내용으로 함께 싸잡아서 우리가 독송을 해 왔습니다. 뭐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좀 엄격하게 말씀드리면 이것은 사실은 법문이 아니고 그 대다라니를 이제 열어서 청한다 하는 그런 뜻이라고 하는 것도 참고로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열어서 청하는 방법으로서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여기까지가 이제 일단락이 되죠. 이렇게 이제 돼 있는데,
계수(稽首)한다, 머리를 숙여서 관세음보살의 대비주에게 예를 올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대비주(大悲呪), 여기서 ‘대비주’ 또 ‘대다라니’ 이렇게 하는데 사실은 그 대비주, 또는 대다라니를 지칭하는 말로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 좀더 크게는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또 불교에 귀의를 한다 이렇게 또 생각을 해야 됩니다. 대비주, 다라니 곧 불교고 이 <천수경>에서는 불교 곧 ‘대비주’고 불교 곧 ‘신묘장구대다라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라는 뜻을 달리 갖지를 않고 여기서는 바로 대다라니, 대다라니 곧 불교다, 이렇게 이제 좀 범위를 넓혀서 우리가 이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렇게 보아집니다. 관세음보살의 대비주, 아울러 포함해서 불교의 깊고 오묘한 그 뜻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그 다음에 원력홍심상호신,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은 바로 원력(願力)이 홍심(弘深)하다, 그 중생을 건지겠다고 하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서 중생을 보살피고 건지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자비 또는 자비 원력,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 원력이 크고 깊다, 아주 크고 깊다. 그러면서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상호신(相好身),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몸이다 이 말입니다. 물론 관세음보살의 그림이나 또 조각을 보면은 물론 아름다운 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호신, 아주 좋은 그런 상호를 가지신 몸이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그 자비를 뜻하는 것이지 어떤 외형적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얼마나 깊고 넓었던지 온갖 사람들을, 국왕으로써 제도해야 할 사람은 내가 그 사람 앞에 국왕의 몸을 나타내서 제도를 하고 또는 승려의 몸으로써 제도될 사람에게는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 앞에 승려의 몸을 나타내서 그를 위해서 설법하고 설법해서 제도를 하고,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사람의 모습을 다 나타내서 그 사람에게 알맞는 설법으로서 제도를 한다 하는 그런 그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관세음보살의 원력에 대한, 또 자비의 넓고 깊음에 대한 그런 표현들이 아주 많이 나와 있죠. 그와 같이 관세음보살은 참 원력이 깊고 넓다 그러한 뜻이고 그 다음 상호라고 하는 것도 역시 관세음보살의 마음의 상호, 그 자비, 자비야말로 참으로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지, 얼굴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서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은 그 아름다운 얼굴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의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제 보는 거죠.
그 다음 천비장엄보호지라고 하는 것은 천 개의 팔이라고 하는 말이죠, 일 천 千(천) 자, 팔 臂(비) 자. 천 개의 팔로서 장엄(莊嚴)을 해서 널리(普) 보호하고 감싼다(護持) 그런 말입니다. 천 개의 팔로 장엄을 했다고 해서 뭐 관세음보살이 그야말로 어떤 외형적인 팔이 천 개로 보인다, 그건 아닙니다. 앞서 천수천안을 표현했듯이 여기서 천 개의 팔이라고 하는 것도 천수, 천 개의 손과 같은 의미입니다. 혹은 천수라고도 하고 또는 천비라고도 합니다. 팔에 손이 달려 있으니까 같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관세음보살의 자비, 불교의 자비, 그 자비의 넓고 큰 것을 한없는 자비의 넓이와 한없는 자비의 깊이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장엄을 했다. 그래서 널리 모든 사람을 다 보호하고 감싸고 두호한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겠죠.
그리고 그 다음에 역시 천안광명변관조, 구체적으로 천수천안에 대한 그런 그 표현들을 여기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안광명변관조라, 천 개의 눈광명(千眼光明)으로서 천 개의 눈으로써 비춰서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두루두루(遍) 관조(觀照)한다, 살펴본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중생의 아픔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관세음보살의 그 자비, 다시 말해서 불교의 자비를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이렇게 상징적으로 아주 참 잘 나타내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에게 자비를 표현하는 그런 시가 또 이런 시가 있습니다. 그건 관음예문(觀音禮文) 이라는 것을 한 구절 소개할까 합니다. 그럼으로써 천 개의 팔과 천 개의 눈으로 우리 중생들을 감싸는 그런 내용들을 우리가 엿볼 수가 있죠.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주소서.
아쉬울 것 없도다
천의 손이여
당신 잊고 있을 때도 감싸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도다
외로울 것 없도다
천의 눈이여
당신 찾기 전에도 돌봐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외로울 것 없도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그 자비, 불교의 자비를 참 제대로 믿고 의지하는 그런 자세는 관세음보살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우리를 살핀다, 그렇다면은 이제 우리는 아쉬울 것도 외로울 것도 없다, 내가 관세음보살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도 그분은 나를 감싸줍니다. 그게 보살의 자비죠. 내가 부른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른다고만 해서 와서 보호해주고 감싸준다는 것, 이건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아닙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또 외로울 것 없습니다. 천의 눈이 나를 늘 지켜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저 달 뒷면에 혼자 있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은 나를 지켜줍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찾기 전에도 관세음보살은 나를 돌봐주고 있다, 그럼으로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외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하는 그런 정도로 정말 콱 믿어 들어가는 그러한 자세, 이러한 자세가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우리가 좀 이해하는 그런 지름길이 아닐까.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이해한다면 불교의 자비를 이해하는 것이고 불교의 그런 깊고 깊은 자비를 이해하는 길은 바로 내가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의지의 출발하기도 하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 염화실글쓴이 : mary 원글보기메모 :'불교 > 천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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