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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2) 녹취
    불교/천수경 2014. 11. 5. 16:56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2)

     

    천수경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3)

     

    불교 서점에 들려서 이런 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한 십오 년 쯤 전일까요. 어떤 경전이 가장 많이 팔립니까 라고 했더니, 천수경을 팔아서 불교 서점을 운영한다 라고 대답하는 그런 불교 서적상이 대다수였습니다. 거의 매상고의 칠, 팔십 프로를 천수경에 의존한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만치 천수경이 많이 읽히고 또 그만치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그런 경전이라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천수경은 구체적인 이름은 구체적인 이름이 나올 때 다시 설명 드리기로 하고, 우선 ‘천수경’이라고 하는 구절부터 보죠. 이 천수(千手)는 그야말로 천 개의 손이다, 또 천안(千眼) 이라고 하면 천 개의 눈이다, 그리고 관자재보살은 어제 말씀을 드렸죠.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데 자유자재하신 보살이시다, 그런 말이고, 또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마는 대승불교에서 대두된 그런 낱말입니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같은, 수행이 부처님 다음 가는 높은 수행의 보살에게 붙히는 명칭임과 아울러 또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불교도에게 공히 붙히는 그런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보살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필요한 그런 이해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관세음보살에 한해서 우리가 일단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은 광대원만무애대비심(廣大圓滿無碍大悲心)을 가지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넓고 크고 원만하고 또 걸림이 없는 그런 큰 자비심의 소유자이시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또 그러한 관자재보살의 넓고 크고 원만하고 걸림이 없는 대자비심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대다라니(大多羅尼)라고 하는 그런 다라니에서 그 자비심이 나오는 것이고 또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은 그 다라니 속에서 다 표현되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부처님의 말씀을 또는 성인의 말씀을 우리가 (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다라니경도 역시 부처님의 경전과 함께 우리가 보는 거죠. 그래서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多羅尼經)> 이것이 이제 우리가 간략하게 해서 <천수경>이라고 하는 <천수경>의 구체적인 이름이 되겠습니다.

     

    천수천안은 두말할 것 없이 중생들을 보살피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꼭 어떤 천 개의 형상을 갖추고 또는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형식적으로 다 갖춘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아서는 곤란한 것이죠. 어찌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만으로 되겠습니까. 사실은 한 중생에게 팔만의 병고고 한 중생에게 팔만의 번뇌라고 할 수가 있는데 어찌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만으로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천수천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광대원만하고 걸림이 없는 큰 자비심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천수경>을 바로 이해하는 길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이것은 <천수경>을 이해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불교에 있어서 보살의 존재, 다시 말해서 관세음의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한 번 가져볼까 합니다.

     

    이것은 물론 여러 사람의 견해가 각각 다를 것입니다마는 저 나름의 보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길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관세음보살은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해서 참으로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곳곳에, 중생이 있는 곳에, 중생의 문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의 아픔이 있는 곳에, 어디든지 다 나타난다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는 관세음보살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누구도 그렇게 쉽게 또 만난 적은 없습니다. 여기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려면 얼마든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보살이라는 것에 대한 말씀을 앞서 간단하게 언급을 했는데,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과거 부파불교시대에 교단 위주 또는 수도자 위주의 원시불교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됐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대승불교라고 그렇게 합니다. 거기서 내세운 기치가 바로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뜻으로 이제 표방이 되죠.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구제하려고 하는 그런 생활 태도, 다시 말해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고 하는 그러한 이치가 이 시대에 있어서 또 그 당시 불교가 해야할 일이고 부처님의 본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일어난 사상이 대승불교운동이고 또 거기에 이상적인 인물로 대두된 것이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어떤 고난도 구제하고 어떤 고난도 구제하려면 어떤 모습으로도 어떤 내용의 설법으로도 충분히 모든 사람의 고뇌를 다 구제할 수 있는 인간상을 우리는 생각하게 된 것이고 그럼으로써 보살이라고 하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를 걸머지고 중생구제에 나선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어디엔가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어떤 역사적인 실존, 이런 인물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물론 없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아미타불도 계시고 비로자나불도 계시고 또 그외 천 부처님이니 삼 천 부처님이니 심지어 만 부처님, 그리고 온갖 보살님들이 다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그런 자비의 화신으로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은 지장보살님이나 또는 관세음보살, 기타 문수, 보현같은 그런 많은, 역사적인 실존이 아닌 그런 보살님들도 역사적인 실존 이상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고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이해를 할 때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천수경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관세음보살 뿐만 아니라 보살이라고 하는 건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또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 보살에 대한 이해를 좀더 익히 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천수경>의 첫 구절이죠. 물론 대장경에 실려있는 <천수경>에는 정구업진언이라든지 이런 것은 물론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진언집 같은 데 실려있는 그런 진언입니다. 정(淨)은 깨끗하게 한다, 청정하게 한다 하는 말이고 구업은,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이라고 해서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입으로 하는 행위, 생각으로 하는 행위, 몸으로 하는 행위, 이렇게 해서 삼업이라고 하죠. 입으로 짓는 짓, 입으로 하는 행위, 이렇게 해서 구업(口業)이라고 합니다. 정구업이라고 하면 입으로 지은 모든 좋지 않은 업들을 깨끗이 한다.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는 행위가 행위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 하나하나가 사실은 쌓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아주 작은 말과 작은 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 우리의 깊은 의식 세계 속에, 그것이 장식(藏識)이라고 해서 없어지지 아니하는 어떤 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갈무리한다라고 해서 우리의 하는 짓들을 갈무리한다 는 뜻에서 장식이라고 하고 또 그것은 갈무리 되어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멸식(無滅識)이다, 없어지지 않는 의식의 세계다, 이렇게 이야길 하죠. 그래서 우리가 입으로 짓는 모든 업들이 거기에 모두 갈무리 되는 것입니다.

     

    또 설사 갈무리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말 한 마디를 우리가 내뱉으면 거기에 대한 무엇이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과보라고 할까요, 그런 과보가 따라오게 돼 있고, 또 업의 작용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 작용의 힘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그래서 업력난사의(業力難思義)라, 업의 힘은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하다 라고 해서 그런 말을 하죠.

     

    입으로 지은 업을 청정하게 한다. 입으로 지은 업을 어떻게 하면 청정하게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말하자면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진언(眞言)이라고 하는 말은 천수경을 위시해서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지요. ‘만트라’ 라고 하는데 ‘주문’ 이니 ‘다라니’ 니 또는 ‘진언’ 이니 하는 그런 세 가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는 대동소이합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대개 짧은 것은 진언이라고 그러고 또 긴 것을 다라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또 주문같은 것은 약간 짧은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것도 분명한 분별은 아니고 사전적인 해석으로 보더라도 주문, 진언, 다라니, 이 세 가지는 거의 쓰는 경우에 따라서 혹은 주문이라고 하고 혹은 진언이라고, 혹은 다라니다 라고 이렇게 표현할 뿐이다,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글자대로 ‘참말’이다 라고 하는데 참말을 대개 보면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말로 돼 있고 또 인도말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주어, 동사 같은 어떤 문법상 필요한 어휘가 다 포함되어 있는 완전한 하나의 문장으로서 성립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서 또 살펴보면은 낱말 하나 하나에 뜻을 사실은 담고 있고 그 뜻을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래로 이해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해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석도 하지 않으니까 또 이해를 하지 못한 채 그냥 우리가 외우기만 했죠. 물론 진언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 공부방법의 하나로서 열심히 진언만 외우고 주문만 외우고 다라니만 외우는 그 일로서 훌륭한 수행방법으로 그렇게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뜻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시대에는 우리가 범어라든지 빨리어라든지 이런 것들을 공부하는 경향이 높아가고 있죠. 그래서 이런 것들도 앞으로 천수경에 나오는 진언들, 또는 신묘장구대다라니까지도 다 가능하면은 해석을 해 볼까 합니다. 정확한 해석이 될지 그것은 아직 크게 자신이 없습니다마는 제 능력까지는 해석을 해 볼려고 합니다.

     

    진언은 종래로 우리가 해석하지 아니해도 그 나름의 공덕이 있고 또 그 나름의 힘을 발휘한다 라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또 사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따른 이야기가 있죠.

     

    옛날에 어떤 거지가 중국으로 여행을 가서 거기서 거짓말을 하고 자기는 왕족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신이 어떤 고을에 들렸는데, 알고 보니까 왕족이 아니고 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중국 사람에게 ‘저 사람은 거지다’ 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고, ‘거지다’ 하면 당장에 목이 달아날 테니까 그렇다고 ‘왕족이다’ 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이 평소에 반찬에 대해서 투정을 하는데 그 투정을 어떻게 하면은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고을 원이 왕족이라고 하니까 모시고 있으면서 늘 염려했던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이 대신이 가면서 진언을 하나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 사람은 설사 반찬 투정을 하더라도 반찬 때문은 아니고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러주는 이 말만 한 마디 하라, 무슨 말인고 하니, ‘거지인 주제에’ 라고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이 ‘거지인 주제에’라는 것을 알 턱이 없죠. 그래서 그냥 고을원은 그것을 외워가지고 왕족이라고 거짓말한 거지가 반찬에 대해 투정을 할 때는 그 말만 하라고 하고 그 사신은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거지는 거지라고 하는 행색을 숨기고 왕족이라고 하는 어떤 그 모습을 일부러 더 강조하기 위해서 또 투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밥을 갖다 준 사람이 ‘거지인 주제에’ 라고 그야말로 아무 뜻도 없이 또 뜻을 알 리가 없죠, 중국 사람이. 그래서 먼 산보고 그냥 ‘거지인 주제에’ 라고 했는데 이 거지는 정말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죠. 정말 혼비백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몰래 삼십 육계 줄행랑을 쳤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뜻을 모르고 외우더라도 그 말이 통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불보살의 세계, 천룡팔부의 세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많은 호법신들의 세계, 귀신들의 세계 등등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사실은 엄청나게, 수 천 만 배 더 넓고 광대한 까닭에 그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언은 종래로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러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가 어째서 우리가 입으로 지은 온갖 업들을 청정하게 깨끗하게 청소하는 길이 되는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한번쯤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또 입으로 짓는 업이 어디 한 가지입니까. 악담하지요, 그 다음에 거짓말하지요, 그 다음에 두 가지 말, 여기 저기서 이간 붙히는 두 가지 말하지요. 또는 남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비단결 같은 말을 하지요. 이런 등등의 방법을 통해서 온갖 업을 우리가 짓습니다.

     

    그런 입으로 짓는 업들을 모두 청정하게 하는 길이 바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리’라고 하는 것은 본래 ‘쓰리 쓰리 마하쓰리 스쓰리 쓰와하’ 정확하게 거의 원음에 가깝게 발음하면 그와 같습니다. 뭐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굳이 발음을 고쳐서 읽자고 하는 것은 아니고, 뜻으로는 ‘길상(吉祥)’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수리라고 하는 것이. 길상존, 인칭으로.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 마하’는 우리가 알 듯이 ‘큰 길상존이시여,’ ‘대길상존이시여’ 그 다음에 ‘수수리’는 ‘지극한 길상존이시여.’ 그리고 ‘사바하’ 는 진언에 흔히 붙습니다. ‘성취 있으소서, 또 앞에서 말한 내용이 성취되어지이다’ 하는 그런 어떤 바램, 축원, 또 그것을 결정하는, 못 박는 그런 뜻에서 ‘사바하’ 라고 하는 것을 많이 씁니다, 이 밀교에서요.

     

    여기서 길상이라고 하는 말은 입으로서의 길상입니다. 그래서 입의 길상은 뭔고 하니 축원과 찬탄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기서 수리수리 라고 하는 것은 남을 축원하고 찬탄하는 그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막 결혼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입장에서 우리가 예를 든다면은 ‘행복하십시요, 행복하십시요. 크게 행복하십시요’ 마하수리, 그 다음에 ‘지극히 행복하십시요’ 수수리죠. 그 다음에 ‘ 그 행복이 영원하십시요. 그리고 내가 바라는 바대로 꼭 성취되시기를 빕니다.’ 그게 사바하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이라고 하는 말이든지 또 누구를, (예로) 자녀들에게 ‘너는 훌륭하다, 너는 훌륭하다, 아주 훌륭해, 정말 훌륭해. 그리고 너의 이 훌륭한 점은 아마 영원할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훌륭하게 잘 할거야.’ 라고 이렇게 해주는 그러한 형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축원과 찬탄을 다섯 번을 반복해서 하는 그런 입장이 바로 구업을 맑히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구업을 우리가 깨끗하게 하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내가 지은 온갖 악담, 거짓말, 또 두 가지 말, 비단결 같은 말, 이런 업들을 녹이는 길은 바로 남을 향해서 축원해 주고 찬탄해주고 훌륭하다고 해주고 행복할 것이라고 해주고 아주 영광이라고 해주고 축복해주고 축하해주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에 보탬이 되는, 말로서 빌어주는 그러한 길이 바로 우리가 입으로 지은 온갖 악업들을 깨끗이 소제하는 지름길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수리수리 마하수리’를 뜻을 이해하고 또 해석해 놓고 보니까 참으로 우리가 구업을 맑히는 길이 바로 이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속에 들어있구나 하는 뜻을 우리가 알게 되겠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의 중요성은 참으로 큽니다. 팔만대장경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경, 또 한국 불교도가 제일 친숙하게 읽는 경전, 다시 말해서 팔만대장경 속에서 그 읽히는 비율로 봐서 천수경이 대표적인 경전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죠. 그런 대표적인 경전, 중요한 경전에서 그 첫마디가 말조심하라, 말 잘하라, 입조심하라, 라고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한다고 할 때 참, 말이라는 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새삼 정구업진언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아니 천수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거죠.

     

    사람은 두 말할 것 없이 말에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이 말 때문에, 한 마디 말로 우리가 천냥 빚을 갚는다 하는 그런 말도 있듯이, 말에 얽힌 그런 이야기가 수없이 많습니다마는 한 가지 예를 든다면은 이런 이야기가 있죠.

     

    옛날에 박상길이라고 하는 나이가 지긋한 백정이 장터에서 푸줏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양반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래서 한 양반은 ‘얘, 상길아, 고기 한 근 다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상길씨는 아주 좋은 솜씨로 칼로써 고기 한 근을 슥 베어서 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또 같이 간 양반이 ‘박서방, 나도 이 고기 한 근 베주세’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상길씨가 있다가 ‘예, 고맙습니다.’ 하고 아주 기분좋게 고기 한근을 잘라서 또 두 번째 양반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앞에 먼저 산 양반이 가만히 고기를 비교해 보니까 영 그 근 수가 눈으로 보기에 아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거의 자기 고기는 같은 한 근인데 반 정도 밖에 분량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따졌습니다.

    ‘어째서,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저 사람 것하고 내 것하고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따졌어요. 그러니까 그 박상길씨 대답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네, 그 손님의 고기는 박서방이 잘랐고, 지금 양반 고기는 상길이가 잘랐으니까 상길이가 자른 고기하고 박서방이 자른 고기 하고 그것은 고기 근 수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라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니까, 그 양반도 다시 두말할 여지가 없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와 같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은 제일 중요한 것이고 일어나면서부터 자는 순간까지 말로써 하루를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게 우리가 생각했을 때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 그것도 첫마디가 ‘말조심하라, 말 함부로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정구업진언으로 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있고, 또 불교가 그야말로 어떤 공허한 공리공론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불교라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보다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자고 하는 것, 그것이 불교라고 할진대 바로 보다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사는 길의 한 방법으로서, 또 아주 중요한 방법으로서 말에 대한 교훈을 팔만대장경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의 첫대목에 실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뜻하는 바가 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안되겠죠. 오늘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ma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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