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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3) 녹취
    불교/천수경 2014. 11. 5. 16:56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3)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 安慰諸神眞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3번)

    개경게 (開經偈)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정구업진언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진언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고, 구업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고, 또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드리면은 축원과 찬탄의 말이다. 행복하십시요, 또는 훌륭하다, 아주 영광스럽습니다, 또는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이런, 남을 향해서 축원해주고 찬탄해주고 칭찬해주는 말이 바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한다는 말입니다. 수리라는 말은 길상스럽다는 말이지만 입으로서의 길상이기 때문에 입의 길상이란 결국 뭔고 하면 축원이요, 찬탄이다. 행복하십시요, 또 축하합니다, 훌륭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결국은 입의 길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남을 비난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그래선 안되고 축원과 찬탄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지은 입의 잘못을 깨끗이 녹이고 청정하게 하는 그런 길이다, 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 安慰諸神眞言)’이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오방내외라고 하는 것은, 오방은 동서남북하고 중간- 중방까지 해서 오방입니다. 오방의 안팎, 그것이 내외고, 여기서 말하는 ‘오방’은 ‘온 천지에 가득차 있는’ 또는 ‘온 우주에 변만해 있는’ 그런 뜻이 되겠구요. 모든 신들을 안위한다, 편안하게 해 주고 위로해 주고 잘 다독거린다 는 뜻이 오방내외안위제신입니다. 모든 신들이죠. 이 신이라고 하는 것도 이야기할려면은 끝이 없겠습니다마는 이 신은 인간보다도 그 능력과 신통이 훨씬 높은 그런 신장단의 신중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죠. 또 그런 신들 뿐만이 아니고 인간보다도 훨씬 저급한 그런 신들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뭐 간단하게 생각을 하면은 여기서는 그런 모든, 인간보다 저급하든지 고급스럽든지 어떤 능력이 인간만 못하다든지 같든지 아니면 훨씬 더 낫든지 간에 일체 모든 그런 신들, 오방내외에 있는 모든 신들이니까요, 그런 모든 신들을 다독거리고 안위한다, 하는 그런 진언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기 위해서 그것을 독송하기 위해서는 입을 깨끗하게 했었고 그래서 정구업진언이 대두가 되었었고 또 입만 깨끗하면은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내가 불사를 하든지 불공을 올리든지 제사를 올리든지 무엇을 하든지 불사를 하고자 하는 마당에 있어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온갖 신들을 잘 다독거리고 안위시킬 그런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경을 읽어도 경이 더 잘 읽어지고 참선을 하든 기도를 하든 어떤 불공을 올리든 제사를 지내든 온갖 제반 불교 행사는 오방내외에 있는 모든 신들을 안위시킴으로부터 그것이 순조롭게 아주 순리적으로 잘 이루어진다, 하는 그런 뜻에서 순서상 바로 입을 깨끗이 해서 그 입으로 모든 신들을 안위시킨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이렇게 돼있죠. 거기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 다음에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 옴’자가 독립된 하나의 내용이죠.

    그래서 ‘나무 사만다 못다남’ 부터 설명을 하면은 ‘나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할 때 쓰는 그 나무입니다. ‘귀의합니다.’ 또 이것을 좀 더 명확히 해설을 하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라고 해야 옳습니다. 단순히 귀의만 하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죠. 받들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삼보에게 귀의한다 하더라도 삼보에게 귀의하고 받드옵니다, 받들어야 옳다는 거죠. 나무란 뜻은 귀의란 뜻이고.

    사만다’는 보변이란 뜻입니다. 넓을 보普 자, 두루 변遍 자, 보변하다, 널리 두루 계신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만다가. 그 다음에 ‘못다남’은 ‘못다’는 ‘붓다’예요. 붓다의 표기가 ‘못다’ 라고도 되고 ’붓다’ 라고도 되고, 여러 가지 전수하는 과정에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인도에서 발생을 해서 중국을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한자로서 범어를 표기를 했죠. 한자도 사실은 범어의 음이 정확하게 표기가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 우리가 범어의 발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한자 음대로 표기를 합니다. 그래서 ‘못다남’ 이라고 이렇게 돼 있는데 그래서 영 다른 방향으로 간 그런 음들이 많고 또 어떤 것을 들으면 거의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외우는 진언이라든지 다라니는 국적 없는 소리다 이렇게 보아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뭐 우리나라 말이라 하더라도 시대가 흘러버리면은 소리가 달라지는데 인도의 옛말, 그것이 중국을 거치면서 중국말로 표기를 했다가 또 중국말을 우리식 발음으로 우리글로 표기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런 것이 앞으로도 자주 눈에 띄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것들도 염두에 두시고 참고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못다’는 ‘붓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남’ 자는 복수를 나타내는 그런 글자입니다. 앞에서 사만다, 보변, 널리 두루 계신다, 라고 했으니까 복수가 꼭 따르게 돼 있죠. 그래서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들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이렇습니다.

     부처님께 일단 귀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오방내외에 있는 모든 신을 안위하는데 왜 부처님께 귀의하느냐. 그게 참 필요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말하자면 쉬운 표현으로 빽이 든든해야 됩니다. 일단은 빽이 든든해야 돼고 그 다음에는 그렇다고 가까이 있는 동사무소의 행정적인 처리 같은 것을 우리가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웃들, 가까이 있는 동사무소, 파출소, 이런 관계들도 어떤 행정적인 절차를 잘 밟아서 완전무결하게 해야만 일이 잘 돌아갑니다. 어떤 행사를 하든지 공사를 벌이든지 간에.

     

    그래서 위로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다음에 아래로는 뭔고 하니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다시 말해서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동사무소라든지 파출소라든지 관할 관서, 구청, 이런 데 모든 행정적인 절차와 또 그분들과의 유대, 인화, 이런 것들을 잘 원만하게 해 놓음으로 해서 어떤 일이, 어떤 불사가 원만히 잘 치루어진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또 직접 관계되는 관할 관서에만 사실은 일을 잘 다독거려 놨다고 해서 전체적인 일머리가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위와 아래가 다 혼연히 조화을 이루어서 잘 다독거려져야 그래야 제대로 불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가 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 자는 뜻이 아주 많죠. 첫째는 귀의라고 하는 뜻도 되고 찬사라고 하는 뜻도 되고 모든 진언의 왕이다, 이렇게 봅니다. 또 모든 부처님 법문의 어머니다, 또 온 우주의 핵이다, 그리고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옴’의 현행이다, 이렇게 까지 봅니다.

    귀의한다, 극찬, 지극히 찬탄하는 그런 의미, 그리고 또 한가지 뜻은 섭복한다, 나를 해칠려고 하는 사람에게 정말 이 ‘옴’ 을 함으로써 나를 해치려고 하는 상대가 놀라고 두려움에 질려서 나를 해치지를 못하는 그런 의미도 이 ‘옴’ 자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섭복이라 그러죠, 섭할 섭(攝) 자, 항복할 복(伏) 자 입니다, 그래서 섭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온 우주의 핵이다, 핵심이고 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바로 이 ‘옴’에서 나왔다, 하는 거기에 우리가 좀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옴’자는 그와 같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또 진언 중에 왕이기 때문에 ‘옴’ 하나 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진언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죠. ‘옴’이란 소리를 물에다 파장을 주어서 그 물을 마시면은 어떤 경우 만병통치한다, 라고 그렇게 선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영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헷세가 쓴 ‘싣달타’에도 보면은 그 싣달타라고 하는 주인공이 이 ‘옴’ 자 관(觀)을 통해서 수행을 쌓아가는 그런 내용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와 같이 불교, 다시 말해서 <천수경>은 밀교의 경전입니다. 이 밀교에서는 특히 또 진언이니 주문이니 다라니니 할 때에는 이 ‘옴’ 이 어쨌든 왕이고 ‘옴’ 이 그만치 중요합니다. 그래서 ‘옴’이 자주 나옵니다. ‘옴’ 은 그런 뜻이고.

    도로도로’ 라고 하는 말은 진정하는 형용사입니다. 어떤 다독거리고 누구를 진정시키고 그럴 때 아주 그 진정시키는 형용사입니다. 아주 자비스러운 손길로 등을 친다든지 어루만져준다든지 또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서 아주 잘 달랜다든지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지미’는 모든 신들을 안위하는 종자입니다, 종자. 이 진언 이야기를 하면은 종자라고 하는 말을 자주 쓰게 되는데요, 아까 ‘옴’ 자가 역시 우주 만물의 핵이라고 했듯이 이것이 우주만물의 삼라만상의 종자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고, 이 ‘지미’라는 말도 밀교에서는 모든 신들을 안위시키는 일이 바로 ‘지미’라고 하는 이 말 속에서 그런 일이 펼쳐진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을 안위시키는 종자, 이렇게 이해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바하’는 앞에 있었듯이 성취, 또는 속성취, 또 다른 뜻으로는 길상, 여의길상(如意吉祥), 뜻과 같이 되는, 그리고 앞에 그런 일이 완전무결해지이다, 이런 의미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옴’은 중간에 하나의 진언으로서 머리에 놓여 있고, 그 밑으로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는 밑의 사람을 안위시키고 잘 다독거리고 어루만지고 또 인간적으로 친화하는 그런 모습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입니다. 어떤 유대가 아주 원만해지이다, 하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나무 사만다 못다남’은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고 잘 받든다고 하는 것으로서 윗사람을 섬기는 일이고 그 다음에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는 주변 사람들, 특히 아랫 사람들을 잘 다독거리고 어떤 행정적인 절차, 또 닦아야 할 그런 인사, 저 밑에 하소임을 보는 그런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사람도 섭섭하게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통해서 모든 신들을 안위시킬 수가 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뭐 부처님 빽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밑에 사람들만 잘 구슬려 놓는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교훈을 우리가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면은 참으로 이 <천수경>은 구절구절이 우리의, 보통 인간의 세속적인 삶과 정말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어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교훈들이 구절구절이 담겨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렇게 해서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은 마치고 그 다음에 모든 신들을 잘 안위시키고 또 분위기가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을 통해서 완전히 무르익었습니다. 무르익었다고 하는 표현이 아주 좋겠네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불공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또는 뭐 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불사를 행하고 하는 그런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완전히 이제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름 아닌 바로 경을 읽으려고 하는, ‘대비주’를 읽을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 조성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개경게(開經偈)’입니다. 개경게, 경을 펼치는 게송이다 하는 그런 표현이죠. 경을 펼치는 시다. 불교적인 시 형식의 글을 모두 ‘게’ 또는 ‘게송’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수경>도 보면은 게송으로 일곱 자나 다섯 자나 어떤 시 형식을 취한 글들이 많이 보이지요. 그런 것들이 모두 ‘게(偈)’입니다. 그래서 여기 밑에 오는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라고 하는 것은 일곱 자, 칠언 절구(七言 絶句)라고 해서 칠언의 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을 펼치는 시가 되겠다, 이렇게 보는 거죠. 앞으로 이 경전을, <천수경>을, 또 <천수경> 안에 있는 다라니를 우리가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그렇다면 천수경을 이제 제대로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 경전은 첫째는 종이와 먹으로 된 경전을 펼치는 의미가 되겠지만 사실은 깊은 뜻에서는, 경(經)이라고 하는 게 뭐겠습니까, 바로 진리를 뜻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종이로 된 경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진리를 전하자고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보고(寶庫)를 펼친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고 또 진리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일을 비로소 시작한다, 하는 그러한 뜻으로 ‘개경게’를 이해해야 될 줄 믿습니다.

     

    (다음 날 방송분으로 보입니다.)

    ...이 방송을 통해서 경전 공부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은 방송국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경전은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아니면 조사 스님들의 논서이든 아니면 어록이든 어떤 내용이든 간에 사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견해가 영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라고 할까요.

    제가 <천수경>을 이렇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소견이고 저의 안목으로 <천수경>을 파악한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이 경전을 강의하더라도 다 그럴 것입니다.

    근래 그 <천수경> 강의한 책들을 보니까 한 일곱 종류를 제가 보았는데요, 역시 각각 다르고 정말 각양각색이라서 또 각각 다르다고 하는 데서 참고가 많이 되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이해의 길이 있구나 하는 것을 저 나름대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내용도 이것은 개인의 견해다, 절대적인 가르침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그리고 개경게라고 하는 제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개경게는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입니다.

    요즈음은 <천수경> 책으로 나온 것을 보면은 이렇게 우리가 외우는 ‘무상심심미묘법’ 이렇게 외우도록 되어 있는 책들도 있고 또 ‘위없이 깊고 미묘한 법’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해서 우리가 의식을 할 때 법회를 할 때 독송을 하는 그런 법회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대로 ‘무상심심미묘법’ 하고 이렇게 외우는 숫자가 훨씬 더 많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또 번역은 한 사람의 번역을 가지고 함께 쓰는 것이 아니고 사찰마다 각자 대로 번역을 해서 쓰기 때문에 통일이 안 돼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여기서는 본래 우리가 익히 외우던 그대로, 번역되지 아니한 상태로 읽고 또 설명을 하고 또 번역도 해보고 거기에 담겨 있는 뜻을 풀어보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이것을 無上이라고 하면은, 그대로 직역 하면은 사실은 '위없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번역된 것이죠.’ 가장 높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이라고 번역을 하면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높고, 매우 깊고, 심히 깊고 미묘한 법.

     

    백 천 만 겁에 만나기 어렵다.(백천만겁난조우, 百千萬劫難遭遇) 백 천 만 겁! 일 겁만 하더라도 겁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반석겁이라는 예를 하나 든다면은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가 사십리 되는 그런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일년에 한 번씩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서 놀고 올라간다 라고 할 경우 그 선녀들의 옷깃에 스쳐서 그,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가 사십리나 되는 그 넓고 두꺼운 바위가 다 닳아져서 없어지는 그런 세월을 일 겁이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일겁이라고 하는 세월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긴 시간입니다.

    또 어떤 겁의 이야기는 가로 세로 사 십리, 높이도 사 십리가 되는 그런 큰 함이 있는데, 그 함에다 겨자씨를 한 번 다 채우고 다시 그 겨자씨를 하나씩 하나씩 다, 일 년에 한 개씩 넣고, 또 일 년에 한 개씩 드러내고 해서 그것이 한 번 다 담겼다가 한 번 다 밖으로 나오는 그런 긴 시간을 겨자겁이라 해서 그것을 일 겁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불교에는 이 숫자에 대한 개념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하고는 아주 거리가 있죠. 그래서 참으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한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시간, 오랜 시간이라 하더라도 무한에다 견주어 보면은 또 이것도 찰라고 잠깐이다 하는데 사실은 불교에서 숫자에 대해 의도하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다라고 보아집니다.

     

    어쨌건 그렇게 오랜 세월, 그것도 천 만 겁이 지나는 그런 세월 동안이라 하더라도 이 불법이라고 하는 것, 깨달음의 법이라고 하는 것, 바른 삶의 길이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무상심심미묘법이라고 한다면 그 법을 만나기 참으로 어렵다, 그러죠.

    그것을 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이다, 눈 먼 거북이가 나무 판자를 만나는 격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렵고 어려운 것이고. 설사 그런 많은 생명 중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또 주의 주장도 많고 종교도 많고 온갖 사상, 각양 각색의 그런 종교가 많은데 또 불교 안에서도 온갖 양상의 사상이 있고 또 가르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참으로 깨달음의 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 그러죠. 사람의 몸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의 법을 또한 만나기 어렵다. 그 만나기 어려운 것은 마치 눈 먼 거북이가 나무 판자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건 무슨 말인고 하니 저 바다밑에 눈 먼 거북이가 한 마리 있는데 백 년에 한 번씩 숨을 쉬기 위해서 바다 위에 떠오른답니다. 그런데 그 떠올랐을 때 의지할 만한 어떤 나무를 만난다면은 그 나무에 의지하고 숨을 한껏 쉬고 그렇게 바다 밑으로 내려갈 수가 있다죠. 그런데 그 눈 먼 거북이가 바다 위로 떠올랐습니다. 떠올랐을 때 마침 올라오다 보니까, 큰 판자가 있고 판자에는 구멍이 뚫려져서 목을 내밀고 그 판자에 의지해서 숨을 쉬기가 아주 좋다,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 눈 먼 거북이가 올라왔을 때 마침 그 자리에 판자가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설사 그 옆에 있다 하더라도 눈 먼 거북이가 그 판자를 찾아간다고 하는 것도 만무하고 설사 또 판자나 나무가 떠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구멍이 뚫혀서 쉬기가 아주 좋은 그런 판자를 만난다고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확률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확률과 같이 사람의 몸 만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몸을 받고 또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저런 쉬운 인연으로 설사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알고 보면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과거 숱한 인연이 쌓이고 쌓여서 오늘 이러한 시간, 우리가 천수경을 맞이하고, 이 시간, 이 늦은 시간에 공부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할 때에 참으로 다행스럽고 소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ma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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