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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1) 녹취
    불교/천수경 2014. 11. 5. 16:55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1)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가을철 프로그램 개편에 따라서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한밤의 경전공부’라는 시간을 통해서 함께 경전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는 경전이 대단히 많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까 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불교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 중에서 법에 해당하는 것이 경전이다 라고 보겠습니다. 불법승 삼보라고 하면 부처님과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불교도를 일컫는 말이지요.  

    여기서 경전이라고 할 때 경전은 대단히 많습니다. 우선 경과 율과 논, 이렇게 경율론(經律論)을 삼장(三藏)이라고 하고 거기에다 조사스님들의 논서, 어록 또는 법문집, 각종 저술, 문집 이런 등등을 모두 합해서 불교의 경전이다, 이렇게 하죠. 그것을 우리가 흔히 ‘대장경’이라, 또는 우리나라에 모셔진 장경을 일컬을 때는 ‘팔만대장경’이다, 이렇게 합니다.  

    이 법보로서의 부처님의 경전은 우리가 귀의해야 할 대상이고 또한 믿음의 대상임과 아울러 불교도가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공부해야 할 우리 공부의 대상이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입니다. 장경에는 여러 가지 장경이 있습니다. 우선 장경을 기록한 언어로서 분류를 한다면은 범어, 즉 산스크리트 어로 된 경전이 있고, 또 빨리어로 된 경전이 있고, 한문으로 된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로 된 경전도 있고, 또는 티베트어, 그리고 일본어로 된 경전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흔히 알려진 경전으로서는 고려대장경이 우리나라에서 편집하고 판각을 한 경전이고, 중국에서 들어온 빙가장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든, 퍽 수정이 잘 되었고 교정도 잘 된 것으로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경전들 중에서 우리 불교인들이 불교를 바로 이해를 하고 또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소견과 자기의 어떤 주의, 주장이 아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하고 또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하자고 하는 그러한 취지에서 경전 공부 시간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경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다양하고 또 그 양도 대단히 많아서 경전의 권수로 우리나라에 모셔진 팔만대장경만 하더라도 육천 칠백 구십 일권이 됩니다.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팔만 사천 번뇌를 치료하기 위한 팔만 사천 종류의 법문이다 라고 하는 의미에서 팔만 대장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수도 육천칠백구십일권이 되고 또 그것은 고려대장경에 실려 있는 경전일 뿐입니다. 또 다른 장경에 실려 있는, 다시 말해서 중복을 피하고 우리가 대강 계산하더라도 사실은 만여 권에 가까운 그런 아주 방대한 경전이 있습니다.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이 경전이 지극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한다면은 두말할 것 없이 경전에 근거를 두고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불교를 바로 공부하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경전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우리가 공부를 해야 가능하면은 노력을 덜 들이고 불교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러한 문제가 있게 마련인 것이죠. 그래서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하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바의 경전이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를테면 ‘한국 불교 소의경전이다’ 이런 말을 쓰죠. 그래서 한국 불교도들이 불교를 공부하면서 흔히 공부해야 할 경전으로 이해되어진 그런 경전, 또 전통 한국 불교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공부해 왔던 그런 경전들, 이런 것들을 소의경전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만여 권에 가까운 경전 중에서 사실은 우리가 많이 읽는, 많이 읽히는 그런 경전은 그렇게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한 삼십 여 권이 될까요. 삼십 여 종류의 경전이면 아마 그런대로 불교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기본이 되는 그런 경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경전 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떤 경전부터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이것도 연구를 해 본 바입니다. 그래서 물론 중요한 경이 있고 많이 읽히는 경이 있고 또 최초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도 있고 최후에 설하신 경전도 있을 수가 있고, 또 대승경전이니 소승경전이니 이런, 우리가 이런 중요성을 생각할 때 그 대상과 중요성을 가리는 방법은 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경전공부를 시작하면서 경전에 대한 선입관, 불교 경전은 어렵다, 또 한문으로 되어서 더욱 일반인들이 보기 어려운 것이다, 해서 우리가 경전을 좀 멀리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가까이 하는 경전, 뜻이 어떻든 그것도 물론 중요하겠고, 초기 경전이냐, 아니면 중기 경전이냐, 아니면 후기 경전이냐, 또는 불교의 핵심이 얼마만치 담겨 있는 경전이냐, 하는 이러한 것을 생각을 해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경전이 무엇일까, 또 우리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경전이 무엇일까, 이런 것을 우선 편안하게 생각을 해서 선택을 한 것이 <천수경>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천수경> 강의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경전 중에서는 매우 친숙한 경전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야심경>과 그리고 <금강경>과 아울러 최소한도 한국 불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라면은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이 세 가지 경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사원에서 아침 저녁으로 독송할 뿐만 아니라 요즘 불자의 가정에서 아침 일찌기 그것을 독송하기도 하고 혹은 또 독송한 테이프를 듣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경전이며 또 우리가 불교의 각종 의식, 예를 들어서 불공을 드린다든지 제사를 지낸다는지 또는 어떤 큰 행사를 한다든지 할 때 반드시 <천수경>을 독송함으로부터 그 날의 행사가 시작이 되고 또 불공이 시작이 되고 제사가 시작이 됩니다.  

    이와 같이 <천수경>은 각종 의식 때 쓰이는 그런 경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교의 신행 생활을, 하루의 신행 생활을 시작할 때,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던지 아니면 다른 경전을 읽던지 또는 사원에 가서 어떤 신행생활을 하던지 간에 맨처음 <천수경>을 한번 독송을 하고 나서 절을 하던지 아니면 여타 다른 경전을 읽던지 아니면 또는 다른 기도를 올리던지 하는 그런 경전으로서 <천수경>이 제일 친숙하고 제일 많이 읽히는 그런 경전입니다. 그래서 불교도 뿐만 아니라 <천수경>은 비불경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에 대해서는 아주 친숙하게 알고 있는 그런 경전입니다. 따라서 첫 구절에 나오는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고 하는 그런 구절은 어린 아이들도, 국민학생들도 아주 그 익히 외우고 있는 그런 정도의 경전인 것이 바로 <천수경>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천수경>부터 경전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천수경>이 우리 나라에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가, 또 <천수경>의 주된 사상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천수경>과 앞서 말씀드린 불교의 전통 장경, 대장경에 수록돼 있는 <천수경>과의 관계들, 이런 것들을 간단하게 좀 살펴보고 <천수경> 본문 공부를 할까 합니다.

    우선 <천수경>과 관음신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래서 ‘<천수경>’ 하면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 해야 되고 ‘관세음보살’ 하면 반드시 <천수경>이 따라 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관세음보살이란 어떤 분이고 또 <천수경>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천수경>의 주인공은 관세음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자세한 경전 제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약(略)해서 <천수경>이라고 하지 사실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천수경>의 구체적인 이름이죠. 그 안에 보면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관자재보살은 두말할 것 없이 관세음보살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또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여타 다른 많은 이름들에 대한 그런 문제는 <천수경>을 직접 공부할 때 경문 강의에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마는 우선 관자재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어떤 보살이 됐든 혼동은 없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공부한다면은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아는 그런 보살로 되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불교에 있어서 자비를 상징하는 또 자비를 대표하는 그러한 보살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대자대비관세음보살’ 이렇게 이야기 하죠. 큰 자비심을 가지신 관세음보살이다. 그래서 그런 입장으로 보면은 불교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비의 종교다, 이런 입장으로 보면은 사실은 관세음보살은 오늘날에 있어서 불교를 대표하는 그런 보살이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천수경>은 바로 그와 같은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정신과 자비와 지혜와, 자비의 실천, 그 자비의 실천이 아주 다종다양합니다. 그런 다종다양한 자비의 실천의 여러 가지 모습들, 그리고 그 자비에 대한 원력의 삶, 아주 원력이 깊은 관세음보살의 그 인생,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또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바로 <천수경>이다, 이렇게 봐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능엄경>이라든지 <법화경> 보문품이라든지 하는 그런 경전에도 물론 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천수경>은 오로지 관세음보살에 대한 자비와 원력과, 어떤 그 지혜의 실천, 이런 것을 모두 담고 있다, 이렇게 보아집니다.  

    관세음보살이라면 불교인이라면 그 나름대로 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천수경>을 통해서 한번 더 우리가 살펴본다면은 관세음보살은 앞서 말씀드렸듯지 관세음 또는 관자재 또는 광세음, 빛날 光 자를 씁니다 세상 世 자, 光世音. 또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만 그렇게 부르고요, 이분은 두말할 것 없이 관이 자유자재하다, 그래서 관자재(觀自在) 라고 합니다. 그 觀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피는 그런 어떤 능력이, 또 관세음(觀世音) 할 때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관세음보살을 필요로 하는 그런 그 소리를 살피는 것이 아주 자유자재하고 그것을 늘 살피고 계신다. 왜냐, 자비로서 중생을 보살피기 위한 까닭에 늘 살피고 계신다, 세상의 소리를 늘 관찰하고 계신다. 그래서 관세음, 또는 그 관찰이 지극히 멀리까지 그리고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래서 그 관찰이 자유자재하다 라는 뜻으로 ‘관자재’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어쨌든 세상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로서 ‘求世大師’라고 해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분은 물론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몸을 변화로써 나타내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특징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상이 물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것도 많은 관세음보살 상 중의 하나일 뿐이지 사실은 관세음보살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인의 특정된 형상이 사실은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모습인 것이지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그런 보살로서 또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면은 하나의 모습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제목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천수천안관자재(千手千眼觀自在)’다, 그렇게 했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다. 바로 가없는 중생의 아픔과 끝없는 중생의 소원, 그래서 천 개의 손으로 천 개의 눈으로서 중생들의 아픔을 감싸고 살핀다 하는 그런 자비의 마음을, 자비 사상을 한껏 담고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어떤 일정한 모습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마음 가운데 일단 새기시고 관세음보살의 진정한 모습은 자비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관세음보살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 그런 모습이지, 어떤 일정한 모습이 있을 수가 없다,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는 특정한 모습으로서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삼십이응신, 서른 두 가지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다음에 또 소개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 네가지의 두려움이 없는 그런 힘과 또 네 가지의 불가사의한 그런 덕을 갖추었다 하는 그런 말씀도 아울러 드리겠습니다. 그럼 서른 두 가지의 몸과 열 네가지의 두려움없는 그런 힘과 또는 네 가지의 불가사의한 그런 덕과, 이런 것은 모두가 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구제의 방편으로써 쓴다 하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오늘 한국의 관음신앙과 <천수경>이 언제 전래되었는가 하는 것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는 신라시대 미륵신앙, 미타신앙과 함께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매우 성행한 걸로 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4권에 보면은 자장율사에 관한 기록 속에 자장법사의 부친은 늦도록 후사가 없어가지고서 걱정하던 끝에 천 분의 관세음보살을 조성을 하고 기원한 끝에 자장율사를 얻게 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고 관세음보살 상을 천 분이나 조성을 해서 모시고 기도한 끝에 그런 훌륭한 아들을 두게 되었다 하는 그런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중생사(衆生寺), 삼국유사 중생사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또는 분황사(芬皇寺)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그런데도 보면은 역시 ‘천수대비’니 ‘삼소관음(三所觀音)’이니 하는 그런 관세음보살, 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요, 김인문(金仁問)이 옥에 있을 때에 관음도량을 설치했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걸로 봐서는 신라 때 다른 미타신앙, 미륵신앙 과 아울러서 함께 관음신앙이 전래됐고 그 관음신앙은 두 말할 것 없이 이 <천수경>과 아울러 전래된 걸로 그렇게 봅니다.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에 보면은 십원육향(十願六向), 열가지 원과 여섯 가지 향하는 것, 그런 이야기와 또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대자비한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역시 이제 의상대상의 백화도량발원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봐서 관음신앙과 아울러서 열가지 원과 여섯 가지 향, 다시 말해서 천수경에 들어 있는 내용이 보이기 시작하므로 그 당시부터 이 천수 다라니가, 다시 말해서 <천수경>이 전해진 것으로 그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에 천수다라니가 전해진 것, <천수경>과 관음신앙이 전래된 것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졌다, 이렇게 봅니다. 

     

    그리고 <천수경>은,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경전은 사실상 대장경 속에 들어있는 경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러나 <천수경>은 두말할 것 없이 ‘대다라니경’ 이렇게 해서 <천수경> 속에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천수경>의 심장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 천수경이 성립이 됐기 때문에 그것이 있으면은 모두가 <천수경>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장경에 수록된 여러 가지 <천수경>이 있는데 한 열 가지에 가깝습니다. 열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 모두 다 대다라니가 실려 있고 앞 뒤에 대다라니 공덕이라든지 그것을 외우는 방법이라든지 그 다라니를 찬탄하는 이야기라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행 외우고 있는 그런 <천수경>은 역시 대다라니는 대장경에 있는 <천수경>이나 다를 바 없고 또 앞뒤로 의식상의 독송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대장경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중간에 우리의 어떤 그 불공이나 제사 때나 행사 때 의식용으로 새롭게 편집한 그런 <천수경>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수경>의 본래의 그 취지인 ‘대다라니’ 이것은 들어 있기 때문에 천수경으로 이것은 틀림없는 것이고 조금도 대장경에 있는 <천수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는 <천수경>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대장경에 수록된 <천수경>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다라니’가 있는 한은 이것은 조금도 손색이 없는 <천수경>이라고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이고 또 중간에 우리의 의식상에 편리하도록 새롭게 편집한 의도도 물론 다른 <천수경>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의 편집을 했으리라고 그렇게 믿어집니다.  

    언제 현행 <천수경>이 편집이 됐고, 또 누구의 손에 의해서 성립이 됐는지, 그것은 자세한 기록은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현행 <천수경>이 발견된 것은 이조 중엽 이후에 우리의 불교 의식이 발달 했을 때부터 보이는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행 <천수경>과 대장경에 실려 있는 <천수경>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그런 다라니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대장경에 있는 <천수경>과 함께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그 동안 천수경, 관음신앙 그리고 우리나라에 전래된 역사적인 것, 그리고 대장경에 실려 있는 <천수경>과 현행 <천수경>과의 그런 관계들, 이런 것들을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천수경>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천수경>은 불자라면 한 두권 누구나 다 가정에 모시고 계실 줄 믿습니다. 불자가 사찰에 갈 때는 의례히 <천수경> 한 권은 지니고 가시죠. 어느 사찰에 가든지 <천수경>은 법당에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경입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ma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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