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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23강-지견불생분 제31
    불교/금강경 2014. 11. 5. 16:45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3강 지견불생분 제31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須菩提若人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須菩提於意云何是人解我所說義不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是人不解如來所說義何以故

    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다

    須菩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一切法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라 須菩提所言法相者如來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제31, 지견을 내지 않는다[知見不生分]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나라는 지견과 남이라는 지견과 중생이라는 지견과 수명에 대한 지견을 말하더라’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은 내가 말한 이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지견과 남이라는 지견과 중생이라는 지견과 수명에 대한 지견은, 곧 나라는 지견과 남이라는 지견과 중생이라는 지견과 수명에 대한 지견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나라는 지견과 남이라는 지견과 중생이라는 지견과 수명에 대한 지견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존재에 대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알아야 하며,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해서 존재에 대한 상(相)이 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야, 존재에 대한 상이란 여래는 곧 존재에 대한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존재에 대한 상이라고 말 할 뿐이니라.”

     

    내지 않아야 할 관념

    지견불생(知見不生)은 ‘지견을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흔히 불교에서 ‘그 사람이 지견이 있다, 없다, 지견이 형편없다.’ 등의 표현을 하지요.

    지견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깨달음에 대한 이해와 소견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통한 지혜가 지견이고 보다 다른 차원의 안목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은 지혜라는 말과 아울러 지견이라는 말도 익숙하게 쓰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소중하니까 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지견불생하라고 하였습니다. 불생은 ‘생기지 않는다, 생기지 말라’ ‘내지 말라’는 뜻이니 지견불생은 지견을 내지 말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 재미가 있고, 세상사에 대해서 아는 것과 세상사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그런데 그런 것도 우정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는 지견불생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須菩提若人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수보리야 약인이 언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하는 사상을 이야기 해왔지요. 그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견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상은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 자기자신에 대한 고집과 유사한 의식입니다. 그런 것에 대한 사고가 아견이지요.

    부처님은 편의상 사상(四相)에 대한 설법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없다’ 라는 말씀을 하자니까 사상을 이야기 하게 된 것이지요. 사상이 고정불변하는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사상이란 본래로 없지요. 우리 범부들이 살아가면서 사람과 부대끼고 세상과 부대끼다 보니 자아의식이 어떻고, 차별의식, 열등의식, 한계의식이 어떻다 등등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고 하는 상이 무엿무엿 피어올랐을 뿐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실체가 원래 없기 때문이지요.부처님도 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긴 했지만,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須菩提於意云何是人解我所說義不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是人不解如來所說義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시인이 해아소설의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시인이 불해여래소설의니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 이치를 이해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사상이나 고정된 실체의 어떤 견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 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들은 것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가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설사 부처님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진정 부처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이 괜히 하신 말씀이었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고정된 실체로써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은 아니야. 그저 환영으로 지나가는 소리였어’하고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상당히 수준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보리도 실상을 꿰뚫어 본 사람이기 때문에 아상 인상에 대한 실체를 알고 있지요. ‘사상은 있지 않은 이야기다. 다만 어떤 사람의 상황에 맞춰서 부처님이 그저 지어서 하신 말씀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이런 말을 잘 알아듣고, 부처님이 아상 인상을 이야기해도 그 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何以故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다


    하이고오 세존이 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니다

     

    우리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아니며 또 그것이 어떤 고정불변 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이해야말로 금강경의 수준에 걸맞는 이해이고, 금강경을 공부한 사람의 이해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고정불변하게 있는 것이 되어 버리면 그 누구도  그것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푸른 창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본래 없는 것인데 잠깐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아무리 구름이 짙게 깔려도 무시할 수가 있지요. 요는 시간의 문제일 뿐, 시간이 지나면 푸른 창공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고 그것에 겹겹이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무시할 수가 있는 것은 이것이 본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존이 설하시기를 ‘내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이런 말을 하긴 했지만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답게 있었던 것이라면 부처님도 이렇게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래 있는 것을 부정할 까닭이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번뇌 망상 무명 사상에 대한 것들을 그렇게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탐진치 삼독도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문득 일어났을 뿐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사상을 집중적으로 말씀하지만 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삼독을 주로 이야기 합니다. 사상이나 삼독이나 팔만사천 번뇌나 결국은 한 꾸러미이고 같은 권속입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과감하게 생각을 하셔도 좋고 늘 그렇게 부정하고 살아도 좋습니다.

    ‘번뇌 망상과 탐진치 삼독이 없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만이 삼독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사고들이 팽배해 있는데, 그런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해 놓고 거기에 대해서 뉘우치고 참회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그냥 그것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다보면 어느 날 번뇌 무명이 깨달음의 지혜로 얼굴을 바꿉니다. 번뇌가 따로 없고 지혜가 따로 없습니다.

    번뇌가 지혜가 되고 지혜가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저 구름 낀 하늘이 푸른 창공이 되고 푸른 창공이 때로는 구름 낀 하늘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밝은 태양과 푸른 창공만을 생각합니다.

    구름이 좀 끼었더라도 ‘아 그거 금방 개일 거야 걱정하지마’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곧 아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닐새 이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사상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래가 여러 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이야기 했어도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또 사실이고요. 금강경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상의 문제까지도 결국에는 즉비의 논리로써 다 날려버리고 부숴버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금강경이 32분까지 있는데 지금 31분이면 거의 끝에 왔지요. 맨 처음부터 사상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뤘었는데 여기서는 이제 그마저도 즉비의 논리로써 완전히 바닥을 내는 입장입니다. 없습니다. 이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 뿐이지 우리가 죄의식을 갖고  참회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상과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는 모두가 한꾸러미, 같은 권속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사상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그 전부를 아주 시원하게 날려보내는 입장입니다.



    須菩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一切法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라


    수보리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어일체법에 응여시지하며 여시견하며 여시신해하야 불생불상이니라

     


    ‘수보리야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응당히 이와 같이 알아라.’즉비로 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요 이 이름이 중생이다.

    번뇌가 번뇌가 아니요 이 이름이 번뇌다.

    망상이 망상이 아니요 이 이름이 망상이다. ’

    이런 예는 부정적인 입장이고 긍정적인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덕이 공덕이 아니라 이 이름이 공덕이다.

    공부가 공부가 아니라 이 이름이 공부다.

    수행이 수행이 아니라 이 이름이 수행이다.’

    수행과 공부처럼 우리가 늘 좋아하고 긍정적으로 반기는 면도 전부 부정합니다. 부정적인 면이든 긍정적인 면이든 다 같이 부정해야 됩니다.

    번뇌나 상같은 것만 부정해야 된다고 매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가 곧 지혜가 아니라 이 이름이 지혜다’

    이렇게 되어야 한꺼번에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 뭔가 인생을 달리 다른 차원으로 좀 의미있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든 존재, 일체 법에 있어서 꼭 응당히 이와같이 알아야 되고 이와 같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보리심을 발한 사람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지요. 심지어 지나가는 개나 소를 보고도 발보리심하라고 합니다. 자기는 안했으면서도 자비심으로써 짐승에게 발보리심을 권할 정도로 우리 불자들은 보리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보다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존재에 있어서 이와같이 믿고 이해해서 진리라고 하는 상, 법상마저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의 이름이 지견불생분입니다.

    그런데 ‘여시지 여시견’‘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봐야 된다’ 라고 하니까 또 이러한 지견, 이것이 지혜이고 법상인데 이것이 남게 될까봐 그것마저 남겨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최후의 끝까지 자취를 쓸어버리는 것이지요.

    사찰에서는 마당 쓸 때 뒤로 씁니다. 뒤로 물러서면서 마당을 쓸면 나의 발자국마저 쓸어버리고 마당에는 비질한 자국만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도리입니다.

    철저히 쓸어버리는 것이지요. 나중엔 발자국 하나 없는 아주 깨끗한 법당 마당이 관광객을 반깁니다. 절에서 뒤로 가면서 마당을 쓰는 그 이치 하나로써 우리가 또 금강경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됩니다. 근사하지요.

    그렇게 우리 마음이 텅 비었을 때,  모든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제대로 받아들이고 조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須菩提所言法相者如來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수보리야 소언법상자는 여래가 설즉비법상일새 시명법상이니라.


    ‘법상’이라고 하면 진리에 대한 어떤 것, 어떤 모양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법상 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생법상’이라는 말을 했고, 여기서 다시 ‘수보리야 말한 바 법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곧 법상이 아닐 새 이 이름이 법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금강경에서 가장 주력해서 말해온 것이 ‘상이 본래 없다’라는 것인데,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법상’ 마저도 남아서는 안된다고 여래는 말했고,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법상은 법상이 아니라 이 이름이 법상’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라고 해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철저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저한 부정에는 대 긍정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자기 발자국마저 지워버리면서, 마당을 쓸어버릴 때, 발자국은 없어지지만, 그 마당은 남아있습니다. 그런 이치가 대긍정입니다. 철저히 부정한 후 결국 긍정이 남는데 이것이 대긍정인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참 재미있습니다. 불교의 이치를 공부하고 심취하면 그 재미에  집안이야 어떻게 되든지 살림살이가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어지고 돈벌이나 사업보다도 이러한 이치를 좋아하게 되지요. 또 거기에 삶의 가치를 두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생길 때 ‘금강경내지 사구게 만이라도 수지 독송 서사 위인 해설한다면 그 복이 물질적인 금은보화를 보시한 것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라고 한 경전의 말씀이 서서히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상이나 상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지견마저도 사실은 남겨두지 않은 내용으로써 지견불생분을 공부하였습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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