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21강-무단무멸분 제27/불수불탐분 제28
    불교/금강경 2014. 11. 5. 16:44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1강 무단무멸분 제27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須菩提汝若作是念호대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莫作是念하대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라

    須菩提汝若作是念하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莫作是念이니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法 不說斷滅相이니라

     

    제27,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無斷無滅分 ]


     “수보리야, 그대가 혹 생각하기를 ‘여래는 잘 갖춰진 상호를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지 않는가?

     수보리야,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는 잘 갖춰진 상호를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지 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만약 생각하기를,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것이 아주 없다고 말한다’라고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것이 아주 없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단절과 소멸의 초월

    불교용어로서 단멸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끊을 단(斷)자 멸할 멸(滅)자 단멸은 둘다 ‘아주 없다’는 뜻입니다. 무단무멸(無斷無滅)은 ‘단멸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없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모든 현상이 여실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없다’와 ‘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무단무멸이란 ‘없지 않다’는 뜻이지 ‘있다’는 뜻은 아니예요.

    그동안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모든 존재는 그 실상이 근본적으로 공한 것이다, 텅 비어 없는 것이다, 라는 단멸의 입장으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차원이지요. 그렇다고 단멸이 최상의 경지인 것으로 이해하면 아직 부족합니다.

    불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문제인데, 모든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 단멸하다고 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인가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공이나 무와 같은 부정적인 입장은 상당히 고준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존재의 공성이나 무의 철학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깨달음의 경지인가 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가 첫눈에 보고 대상에 미혹된다든지 섣부른 판단을 한다면 온전치 못하지요. 사물이 됐든 사람이 됐든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사람을 이해할 때 처음 본 것에서 한 고비를 넘겨서 부정적으로 볼 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단멸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무단무멸로도 봐야합니다.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단멸이고, 단멸을 한 번 더 부정하는 것이 무단무멸입니다. ‘없는 것도 아니다’ 가 되는 것이지요.

    ‘아 그 사람에게 그런 면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내가 맨 처음 봤던 것은 더욱 아니다’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긍정과 부정을 거쳐서 비로소 그 사람을 이해하는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또 한 예를 들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있는 사실'을 부정하여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단멸'로써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부정하여  ‘결코 단멸도 아니다’라고 하는 '무단무멸'의 입장이 되면 그 때 비로소  다시 ‘산은 다만 산일 뿐이고, 물은 다만 물일 뿐이다’가 됩니다.

    부정을 다시 부정하여  새로운 긍정의 차원으로 돌아섰을 때 그것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면서 긍정과 부정을 다 수용하는 차원이 됩니다. 그것이 중도의 차원입니다.

    중도의 차원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실상대로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불교의 궁극적 견해를 그렇게 설명드릴 수가 있습니다. 

     


    須菩提汝若作是念호대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莫作是念하대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라


    수보리야 여약작시념호대 여래가 불이구족상고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아 수보리야 막작시념하대

    여래가 불이구족상고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라


    앞에서 구족색신 또는 구족제상과 같은 32상 80종호를 다 갖춘 부처님의 완전무결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써 부처라고 하느냐를 묻고는 아니라고 대답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반대로 아닐 불(不)자를 써서 그 구족상과 같은 외적인 현상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 역시 치우친 견해이므로 물론 아니지요. 부처님은 ‘수보리야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래는 수보리에게 '구족상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치우치면 바른 길이 아니지요. 치우치지 않는 길이 중도의 길이거든요. 반야심경에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과 같은 부정하는 말도 나오지만,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무조건 부정하는 것만으로 불교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단멸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는 것이지요.

    긍정도 부정하고, 부정도 부정하여 다시 절대 긍정으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조화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깨달음의 경지도 결국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 생활에다가 이끌어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문제나 어떤 사물의 문제나 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문제들도 너무 긍정적으로만 치우쳐도 안 되고 너무 또 부정적으로만 치우쳐도 안 되지요.

    부정적인 견해나 긍정적인 견해나 모든 견해들을 다 이해하고 수용해서 조화롭게 균형을 잡아갈 때 좋은 사회가 되고 좋은 가정이 되고 사람 관계도 좋은 관계가 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사실 너무 높은 경지라서 우리하고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도 우리 생활로 이끌어서 얼마든지 하나의 교훈으로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須菩提汝若作是念하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莫作是念이니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法 不說斷滅相이니라


    수보리야 여약작시념하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는

    설제법단멸가 막작시념이니

    하이고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어법에 불설단멸상이니라

     

    須菩提汝若作是念하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莫作是念이니


    '그대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대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존재가 단멸이라고 말하는가' 하고 여래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뭐든지 다 부정만 하느냐, 묻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라고 합니다.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해야 된다, 긍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도 하고, 있고 없음을 공히 수용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을 때 완전한 손이 되듯이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우리 자신, 또 부처님의 깨달음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로 우리가 활용할 만한 이치가 담겨 있지요.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法 不說斷滅相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사람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단멸상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법이라는 것은 모든 문제 또는 모든 존재에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단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방편상 부정하는 것이지 단멸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써의 부정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멸상을 설하지 아니한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유의해야할 내용입니다.

    처음 불교를 만나면 ‘인생이 무상하다’는 소리부터 듣지요. ‘일체가 공하다’ ‘모든 것이 무(無)다’ 이런 말도 듣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으로 인생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아요. 공연히 잘 사는 사람이 그 어떤 허무감 무상감에 젖어서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불교를 만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지요.  그렇다고 너무 현실주의자가 되어서 현실에 눈이 어두워서 사는 것도 보기 거북합니다.

    현실을 무상하다고 보는 환멸에 떨어져 있는 사람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현실주의자나 물질주의자도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불교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바로 여기 무단무별분에서 그러한 것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1강 불수불탐분 제28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持用布施하고

    若復有人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이니라 何以故須菩提以諸菩薩不受福德故니라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云何菩薩不受福德이니고

    須菩提菩薩所作福德不應貪著일새 是故說不受福德이니라

     


     제28, 누리지 않고 탐하지 않는다[不受不貧分]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 찬 금 은 보화로써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존재의 무아(無我)의 도리를 알아서 그 숨은 이치를 깨달으면 이 보살이 얻은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누리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자신이 지은 복덕을 반듯이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덕을 누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느니라.”

     

     

    탐착없는 복덕

    불수불탐분(不受不貧分) ‘받아들이지도 아니하고 탐하지도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불교에는 복덕 이야기가 많습니다.  원래 복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지나칠 정도로 복 또는 복덕이야기를 하니까, 허상에 사로잡혀서 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면도 없지 않지요.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살의 삶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이 복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보살은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탐하는 마음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이 이 불수불탐품의 내용입니다.

     


    須菩提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持用布施하고

    若復有人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이니라

     

    수보리야 약보살이 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로 지용보시하고

    약부유인이 지일체법무아하야 득성어인하면 차보살이 승전보살의 소득공덕이니라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보시하는데 사용했을 경우, 또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일체법이 무아인 것을 알아서 진리를 이루었을 경우 이 사람의 공덕은 앞의 보살의 공덕보다 훨씬 수승하다’이런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칠보로써 가득 채워서 보시를 한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공로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아는 것이 그 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공덕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가치를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불교를 조금이라도 가슴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설사 이렇게 까지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나의 알량한 재산보다야 불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정도로도 불법의 가치를 상당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知一切法無我하야 


    법은 모든 사물과 사건입니다.

    사건은 신문지상에 나오는 그런 사건이 아니지요. 불교에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하는 모든 것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잎이나 꽃이 피고 지는 것,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 심지어 식사하고 배설하는 것까지 모두가 다 사건입니다.

    일체 법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과 사물이 모두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아나 무상, 무작, 무언 같은 것에 치우쳐 있을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우선은  일체법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고정불변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라도 이해를 해야 되지요.

    불자들은 이런 말들을 익숙하게 들었기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금과 다이아몬드도 변한다고 보고 있으니까요. 우리 안목으로 볼 때는 아주 느리게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한한 세월에서 보면 다이아몬드도 변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得成於忍하면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이니라


    일체존재가 고정불변하는 아(我)가 없는 것을 알아서 인(忍)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인은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참을 인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참고 있으면 기쁜지 슬픈지 아픈지 아무도 모르지요. 참으면 표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요. 깨달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본 그 진리의 내용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생사가 없는 진리라는 뜻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할 때도 이 참을 인자를 씁니다.

    일체법무아라고 하는 이 진실 역시 바로 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컵은 컵대로 연필은 연필대로 카메라는 카메라대로 육신은 육신대로 내 마음은 마음대로 이미 생멸변화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생멸변화가 이 속에 다 들어있는데 나타나지 않지요. 또 변화하는 것 속에 역시 무생인(無生忍)이라고 하는 생멸이 없는 이치도 틀림없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 ‘일체법이 무아인 것을 알아서 진리를 이룬 사람은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칠보로써 가득 채워서 보시를 한 대단한 공로자보다 훨씬 뛰어난 공덕을 가진다’고 하는 구절을 볼 때면 불자로서 부끄럽습니다.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운다는 것을 숫자로써 계산한다면 남산만한 칠보무더기를 쌓은 것 보다 억만 배나 더 될 것인데 그 중 하나만 가지고 보시를 했다고 해도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 보시로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면 매스컴이 일년 내내 그 사람을 칭송하고 찬탄해도 부족하지요.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그런 보시를 한 사람의 공덕보다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공덕이 천 배 만 배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진리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언제쯤 나의 인격이 될 것인지가 큰 과제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과연 얼마나 불법이라고 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도 반성해야 합니다. 내 삶이나 내가 아끼는 그 여러 가지 모든 것보다도 불교를 얼마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何以故須菩提以諸菩薩不受福德故니라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云何菩薩不受福德이니고

    須菩提菩薩所作福德不應貪著일새 是故說不受福德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이제보살이 불수복덕고니라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운하보살이 불수복덕이니고

    수보리야 보살은 소작복덕을 불응탐착일새 시고로 설불수복덕이니라


    그렇게 공덕이 큰 까닭은 보살이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살은 일체법이 무아인 것을 깨달아서 진리를 깨달은 복덕이든 아니면 이 지구상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를 한 그 복이든 모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공덕이나 과보나 복덕 역시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보살은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람과 이미 혼연일체가 됐기 때문입니다. 혼연일체가 된 이상 누구에게 무엇을 주고받고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해서 거기에 따른 복덕을 다시 받는다, 탐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가 근래 자주 말씀드리는 이시대의 최고의 보살, 최고의 부처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만의 증엄스님 같은 이들은 불교인이다 기독교인이다 그 외 다른 종교인이다  하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인류는 내 사람이다. 나와 혼연 일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좋은 일을 하고 그 공로를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기독교인이다 불교인이다 하는 차별이 없지요. 이 증엄스님은 교회가 없어서 예배를 못보고 있는 어떤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지어 준 사람입니다. 이쯤 돼야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복덕이나 과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불교인다 기독교인이다 나다 너다 보수다 진보다 노동자나 사용자다 하는 것을 이미 다 떠난 상태이지요.

    비구니스님의 이런 사례 하나가 우리에게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경전보다도 그런 사례하나가 진정 불교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거의 회교국가와 다름이 없는데 이 분은 그곳에 TV방송국을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불교 신문에서 제가 몇 년 전에 본 사실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한 생각 돌이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한  일을 성취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흔히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같은 분들을 통해서 많이 이야기 됩니다.


    世尊이시여 云何菩薩不受福德이니고

    須菩提菩薩所作福德不應貪著일새 是故說不受福德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어째서 보살이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야 보살로서 지은 바 복덕은 응당히 탐착하지 않는다’라고 답하십니다. 응자는 응당히, 전혀, 결코 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어떤 보수가 왔다면 한쪽은 비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개 탐착한다든지 또는 내 것으로 만든다든지, 혹은 어떤 결과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어딘가는 비우고 그것을 나에게 당겨오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 그대로 있으면서 나에게 새롭게 생기는 것은 세상 물질에는 없는 일이지요.

    컵을 예를 든다면 이쪽의 컵을 저쪽으로 옮기면 여기는 없어요. 저기 있던 것을 이쪽으로 옮기면 또 저쪽에는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이치예요. 그러므로 보살의 정신에서는 그 한 쪽을 비게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으로써 됐으니까 그것은 그 자리에 둬라.’ ‘내가 아무리 복을 많이 지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이쪽에 오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그것은 그 자리 그 사람들에게 두고 나는 나대로 다 있고’ 하는 것이 보살의 정신입니다. 그러니 보살의 안목에서는 탐착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보살이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외에도 보살로서 얼마나 많은 복덕을 지었겠습니까. 하지만 탐하는 일은 더욱 안하고 또 그것을 온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 내용이 불수불탐분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
    메모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