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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20강-화무소화분 제25/법신비상분 제26
    불교/금강경 2014. 11. 5. 16:43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0강 화무소화분 제25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須菩提於意云何汝等勿謂如來作是念하대 我當度衆生이라하라 須菩提莫作是念이니 何以故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라 若有衆生如來度者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須菩提如來說有我者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以爲有我니라 須菩提凡夫者如來說卽非凡夫새 是名凡夫니라



     제25, 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다[化無所化分]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여래가 ‘나는 반드시 중생들을 제도한다.’라고 생각하리라는 말을 하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실은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다면, 여래는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이 있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말하는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말하기를 ‘범부가 아니다.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라고 하였느니라.”


    분별없는 교화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글자가 넉자이지만 ‘화/무소화/’ 이렇게 띄어서 읽습니다. 한문을 읽을 때 띄어 읽는 것만 들어도 그 사람이 뜻을 알고 읽는지 모르고 읽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이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띄어 읽고 붙여 읽는 길이 생기는데 내용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금강경에 같은 단어들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그래서 금강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 부처 ‘불’ 등과 같이 자주 나오는 글자들을 세어서 몇 번이나 나오는가를 적어 놓은 책들도 있습니다.

    ‘어의운하오’ ‘뜻에 어떠하냐’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말도  여러 번 나오지요.

     


    汝等勿謂如來作是念하대 我當度衆生이라하라


    여등은 물위여래작시념하대 아당도중생이라하라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지레짐작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라고 한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래는 물론 중생을 제도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중생을 제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지요. 이 중생제도가 제일 큰일입니다. 그럼에도 여래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나서 그것을 ‘했다’라고 하는 상에 떨어져 있다면 너무 작은 마음이지요.


     

    須菩提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라


    수보리야 막작시념이니 하이고오 실무유중생여래도자니라


    수보리야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고 하는 사실이 없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참 많이 제도했다고  알고 있는데 조금 다르지요.

    부처님이 중생의 실상을 가만히 꿰뚫어보니까 중생은 제도할  존재가 아니고, 이미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사람이 갖추고 있는 그 사실이 예를 들어서 억이라면 부처님이 먼저 깨달아서 우리를 거든 것은 그 억만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하거든요.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안 되지요.그러니까 부처님은 한 번도 당신이 중생제도를 했다고 생색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인류사에 있어서 제일 큰 사건이고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이라고 하는 이 존재에 대한 가치를 깨달아서 제대로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일은 가장 큰 일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이 세상에 한껏 드러내서 표현했거든요.

    부처님이 보신 그 사람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말, 제일 상위의 표현을 해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부처라고 하자, 사람을 여래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표현으로 하면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하자 신이라고 하자고 해도 다 좋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성인이 아닙니다. 진짜 훌륭한 성인인가 아닌가는 그 안목을 보고 우리가 판단해야 됩니다. 그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골동품 감정사가 제대로 감정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는 그 사람이 골동품을 감정하는 것을 보면 알지요. 진짜를 두고 가짜라고 한다든지 가짜를두고  진짜라고 한다면 제대로 된 감정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 내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감정하고 있는가. 누구의 종이라고 했거나 아니면 업장 많은 형편없는 중생이라고 매도한다거나 하면 사람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감정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부처님이 위대한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감정평가를 제대로 했다는 이야기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실은 너의 본래의 존재는 이와 같은 훌륭한 것이다’ 라고 일러만 줬을 뿐입니다. 그 외 우리에게 다른 것을 억만 분의 일도 보태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처음부터 우리가 그냥 가지고 있어요.

    누가 빼앗아가지도 못하지요.

    그런데 그 가치를 우리가 모르고 살았고 부처님은 눈을 뜨고서 그 가치를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도 나와 똑같은 존재다’ 이렇게 일러줬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때문에 부처님을 위대한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보니까 ‘실로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없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若有衆生如來度者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약유중생여래도자면 여래가 즉유아인중생수자니라


    만약에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했다면 여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래가 아주 못난 중생 저 하열한 중생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보통의 우리들보다도 더 못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이 그 길을 갈 까닭이 없지요.

    특히 금강경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깨뜨리고 그것을 없애도록 하라는 것이 주된 가르침인데 부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須菩提如來說有我者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以爲有我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유설아자는 즉비유아어늘

    이범부지인이 이위유아니라


    자아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 ‘있다’라고 설명을 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꿰뚫어보면 사실 없어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래가 설한 아가 있다고 한 그 사실은 곧 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명유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설유아자 즉비유아 시명유아’ 이렇게 우리가 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금강경의 논리는 너무나도 빤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범부들이 아가 있다고 여긴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요. 사실은 없습니다. 사실은 없는데 범부들이 모르고 착각하고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須菩提凡夫者如來說卽非凡夫새 是名凡夫니라


    수보리야 범부자는 여래설즉비범부일새 시명범부니라


    범부, 또는 범부지인 하니까 또 ‘범부는 있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혹을 하나 떼놓고 나서 또 다른 혹이 또 하나 붙는 격이 되니까 부처님이 참을 수 없는 것이지요.

    ‘즉비범부 시명범부’ 즉비가 또 나옵니다. 참 여러번 나옵니다. 여래가 말한 범부는 곧 범부가 아닐새 이 이름이 범부다라는 것입니다. 설명하려니까 편의상 허물을 뒤집어 쓰고 범부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이지요. 부처님이 허물을 뒤집어 쓰고 말하셨으니 그 허물을 스스로 벗겨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범부 범부 하는 것도 또는 중생 중생 하는 것도 부처 부처 하는 것도 모두 아니다, 편의상 이름을 지어서 그렇게 불러 볼 뿐이다, 그럼 뭐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알면 됩니다. 그런 설명은 금강경에는 없습니다만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그 사람을 두고 이렇게 부르고 저렇게 부르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덕에 우리도 그래도 깨우칠  것이 없는 가운데서 또 깨우침이 있지요. 그것이 우리 불자들의 현실이고 그렇습니다.

     

    범부다 또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도 금강경에 오면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외에 내가 고민하고 내가 갈등하고 내가 관심 쓰고 내가 속앓이 하는 그런 것들이 공허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이 공허해져 버리면 아무것도 없지요. 시원해질 것입니다.

    금강경은 중생들의 상병을 다스리는 데 아주 뛰어난 약입니다. 우리는 보통 약을 재탕 삼탕으로 다려먹는데, 금강경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20탕 30탕도 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계속 다른 명제들을 끌어다가 깨뜨리고 또 그 명제를 깨뜨리고 온갖 명제들을 다 불러들여서 또 깨뜨립니다.

    부처님이 설명하려니까 어떤 용어가 필요하고, 그 용어를 하나 사용하게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또 집착하니까 그것도 깨뜨리고 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금강경은 상당히 단순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상병을 치료하는 약으로써는 아주 뛰어난 약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온 국민의 교과서 내지 전인류의 교과서가 되어도 참 훌륭한 내용이고 하는 신념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0강 법신비상분 제26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 於意云何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

    須菩提言하대 如是如是니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다

    佛言하사대 須菩提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댄 轉輪聖王

    卽是如來로다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다

    爾時世尊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커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니라

     

     제26,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法身非相分]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른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서른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서른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구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반드시 서른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없겠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신체적 특징을 떠난 여래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법신은 어떤 형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전혀 형상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몸을 법신 보신 화신으로써 이야기 합니다. 법신은 부처님의 마음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라면 보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깨달음의 영향력 또는 과보입니다. 화신은 어떤 상황에 맞춰서 나타난 역사적 인물로서의 부처님입니다.

    우리로 친다면 우리의 마음자리는 법신이고 그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하는  것은보신입니다. 마음쓰기에 따라서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 다릅니다. 조그맣게 자기 혼자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고, 좀 더 넓게 가족 내지 집안  동네 등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있어요. 같은 법신을 가지고도 보신이 그와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리 하다보면 화신은 여기저기에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비유컨대 달을 생각한다면 달의 원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달의 모양은  초생달도 있고 보름달도 있지요.  달빛이 다릅니다. 초생달과 만월이 다른 것은 같은 달이지만 그 영향력이 다른 것이지요.

    우리 인생도 만월처럼 세상을 널리 비추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초생달처럼 겨우 발아래 신이나 찾을 수 있는 빛을 내는 사람도 있고, 전혀 아무 빛도 못내는 그믐달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도 그렇습니다.

    법신 보신 화신 이라고 하는 삼신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면 거기에서 삶의 교훈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래 하나의 원만한 달인데 그 달을 얼마나 밝게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비추느냐 하는 것은 각자 우리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 이야기는 보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법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곁들여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법신 역시 어떤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형상이 아닙니다. 똑같은 마음자리인데 밖으로 드러난 것은 전혀 없어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

    須菩提言하대 如是如是니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가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부아

    수보리언하대 여시여시니다 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히 32상으로 여래를 보는가, 관찰하는가, 하고 부처님이 물었습니다. 앞에서 32상으로 견여래부아라는 말이 있었어요.

    견여래부아라고 하면 32상 그것이 곧 여래라고 보는가, 하는 내용이고 관여래부아라고 하면 32상을 통해서 여래를 미루어서 볼 수 있는가 하는 말이예요.

    내용이 조금 다르지요.

    그러니까 수보리가 말하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32상 그대로가 여래는 아니지만, 32상을 통해서 여래를 이해하는 길은 있다는 뜻입니다.

    관자와 견자의 차이가 거기 있지요.

     


    佛言하사대 須菩提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댄 轉輪聖王

    卽是如來로다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다


    불언하사대 수보리야 약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자인댄 전륜성왕도 즉시여래로다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여아해불소설의컨댄

    불응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만약에 32상으로써 여래를 미루어서 관찰할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32상을 갖추었으니 그 얼굴을 통해서 여래라고 미루어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그렇게 잘 생긴 것이 아니지요. 전륜성왕이라면 사천하를 다스리는 왕인데 예를들어서  중국 같으면 천자이고 아니면 요즘식으로 말하면 미국대통령 정도입니다. 전륜성왕도 32상을 갖추었지요.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시기를 그러면 그 사람도 미루어서 여래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수보리가 얼른 생각에 대답을 잘못했거든요. 바로 그 형상이 여래라고 하는 것이나 미루어서 생각하는 것이나 큰 차이는 아닌데 수보리는 착각을 한 거예요. 32상으로써 미루어서 볼 수는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얼른 말을 바꿉니다.

     ‘제가 부처님이 설하신 바를 이해하는 거와 같아서는 응당히 32상으로써 여래를 관찰할 수 없습니다’ 라고 금세 말을 바꾸어서 대답을 하지요.

     

    수보리도 이야기 했듯이 형상이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이고 또 그 형상을 통해서 여래를 이해한다는 것도 안 맞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그 이야기예요.

     

    爾時世尊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커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니라

    佛言하사대 須菩提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댄

    轉輪聖王卽是如來로다


     

    이시에 세존이 이설게언하사대

    약이색견아커나 이음성구아하면 시인행사도라 불능견여래니라

    불언하사대 수보리야 약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자인댄

    전륜성왕도 즉시여래로다


    금강경 사구게가 몇 가지 있는데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 不能見如來)’ 이 구절도 금강경 사구게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유명한 게송이고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이지요.

    게송의 내용은 뭔가 하니 '만약에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여래를 볼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은 몸과 말로써 사람을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색은 곧 물질이고 신이지요. 부처님의 육신입니다. 또 부처님의 말이 곧 음성이고 설법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그 모습이나 뛰어난 설법을 빼놓고는 부처님이라고 하기가 곤란합니다.

    만일 살아있는 부처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전부 그 모습 그대로가 진짜 부처님이라고 할 거예요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수보리와 부처님이 바로 마주보면서 하는 이야기예요.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형상에 속지말라, 음성에도 속지말라 그것은 모두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모습과 그 설법에 치우치거나 속아서는 안 되며 그것은 결코 여래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래의 진정한 뜻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모습도 나타내고 그러한 설법도 한다, 그것이 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얼굴을 가지고서 그 사람의 전부라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 가지고도 쉽게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가 뛰어나면서도 어눌한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말하는 것보다 속이 깊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사람 됨됨이도 절대로 어떤 모습과 말에 있지 않으며 그것과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사구게에서  사람이나 사물, 세상사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그 실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갖춰야 되겠습니다.

    금강경 26분에 좋은 사구게가 나왔습니다.

    다른 것은 못 외워도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 不能見如來)’ 이것만 이해해도 충분히 좋은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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