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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8강-비설소설분 제21/무법가득분 제22
    불교/금강경 2014. 11. 5. 16:42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8강 비설소설분 제21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須菩提汝勿謂如來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若人言如來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니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須菩提說法者

    無法可說是名說法이니라

    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於未來世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잇가

    佛言하사대 須菩提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

    須菩提衆生衆生者如來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제21, 말과 말할 것이 없다[非說所說分]


     “수보리야, 그대는 이러한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스스로 <나는 반드시 설법한 것이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지 말라.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설법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며, 내가 말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설할 수 있는 법이 없다.

     그 이름이 설법일 뿐이니라.”

     그때 지혜를 생명으로 삼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은 중생들이 이 다음 세상에 이러한 도리를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믿는 마음이 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하는 것도 여래는 말하기를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모습과 특성의 초월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설과 소설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능설과 소설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주객(主客)이라는 말 대신에 능소(能所)라고 하는 말을 잘 씁니다. 능은 주체적인 입장이고 소는 객체적인 입장입니다.

    능설(能說)은 능히 주체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 설하는 사람을 말하고 그 설할 거리, 대상이 소설(所說)이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입장은 능설이 되고 그 이야기 거리인 금강경은 소설이 됩니다. 그래서 ‘설과 소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제목에서 설은 능설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풀이해 보면 ‘설하는 나도 없고, 설할 금강경도 없다’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須菩提汝勿謂如來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수보리야 여물위여래가 작시념호대 아당유소설법이라하라 막작시념이니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여래가 생각하되 마땅히 내가 설할 바 법이 있다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래는 물론 능히 설하는 분이시기도 하고 또 설할 법이 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수보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래의 입장에서는 ‘내가 아무리 설법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래가 있고 설명할 어떤 대상이 있는 차원에서 설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何以故若人言如來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니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하이고오 약인이 언여래가 유소설법이라하면 즉위방불이니라 불능해아소설고니라


    부처님은 법화경도 설하고 화엄경도 설하고 금강경도 설하셨습니다. 유마경도 설하고 능엄경도 설하고 온갖 설하신 법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처님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거 참 큰일났지요.

    우리는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이 많아서 ‘저 팔만 대장경이 부처님이 설한 것이다’라고 철저히 믿고 살아갑니다. 불자들은 이것을 상당한 자랑으로 삼고 있어요. 거기에 의지하고요.

    삼귀의를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금강경 내지 팔만대장경 전부에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는 사람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으며 ‘능히 내가 설한 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정말 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팔만사천 배라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셨다거나, 설하신 부처님이 있다고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49년동안 많은 설법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우리가 금지옥엽 같은 부처님의 그 귀중한 말씀을  좋아하고 심취해서 환희심을 느끼고 또 거기에 눈을 뜨고, 마음이 열리는 사람도 있고, 크게 깨달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설한 이치가 고정되게 ‘이것이다’라고 할 것이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須菩提說法者無法可說是名說法이니라

     

    수보리야 설법자는 무법가설을 시명설법이니라.


    금강경에서는 그동안 미증유다, 세계다, 깨달음이다, 중생이다, 부처님의 32상이다 또는 80종호다, 등등  불교적인 모든 것을 즉비(卽非)의 원리로 깨뜨렸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즉비의 논리에 입각하여 깨버린 것이지요.

    이것은 궁극적으로 나라고 하는 아집(我執)과 남이라고 하는 법집(法執)을 깨는 것입니다. 파이집(破二執)이지요.

    모든 것들을 한 번 깨고 거기에서 다시 우리가 새로운 삶을 펼치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는 부처님 설법의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수보리야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설법이 없는 것이다. 이 이름이 설법이다.’

    부처님의 설법인 금강경마저도 즉비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설법자(說法者)는 무법가설(無法可說)에 시명설법(是名說法)이다’ 특히 금강경을 더욱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요. 서로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해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사실 불교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어느 철인(哲人)이, 어느 성인(聖人)이 자신의 주옥같은 설법을 이렇게까지 깨뜨리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런 가르침이 세상에 불교말고는 없지요.  설법이라고 하는 데도 우리가 크게 그렇게 집착할 바가 아니라면 설법 이 전의 소식도 알아야합니다.

     


    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於未來世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잇가

     

    이시에 혜명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파유중생이 어말래세에  문설시법하고 생신심부잇가


     

    혜명(慧命)이라고 하는 ‘지혜를 생명으로 하는’ 뜻의 수보리를 수식하는 낱말이 하나 등장을 했습니다.

    보통 ‘해공제일(解空第一)수보리, 지혜제일(智慧第一)사리불’ 이런 표현을 합니다만 여기서는 평소에 알려진 대로 혜명수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보리를 부르는 말로써는 장로(長老)수보리라는 표현도 있지요.

    부처님께서 ‘설법이 설법이 아니다. 그저 이름이 설법일 뿐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고해 말씀하사대 ‘세존이시여 지금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미래세에 어떤 중생들이 듣고 신심을 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신심이 떨어지는 소리지요.

    ‘설법이 설법이 아니다. 말이 설법이지.’ 이런 말은 곳곳에 붙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부처님이 아니다. 말이 부처님이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요. 이것을 아주 차원낮게 이해하면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런데 금강경 차원은 다르니까요. 금강경 차원에서는 ‘아 그래 맞아. 부처님이 부처님이 아니니까 진짜 부처님이야.’‘설법이 설법이 아니니까 진짜 설법이야.’ 이렇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이해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수보리가 ‘그래서 신심을 내겠습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지혜를 생명으로 하는 사람이니까 이 질문은 아주 그럴 듯한 질문입니다.

     


    佛言하사대 須菩提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불언하사대 수보리야. 피비중생이며 비불중생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저 사람은 중생이 아니야. 편의상 이름을 붙여서 우리가 중생 중생하지. 또 중생 아닌 것도 아니야. 비불중생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흑인하면 백 년 전만 해도 돈에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던 ‘노예’였습니다. 그러데 지금 세계 제일의 강대국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고정된 것이 없어요.

    부처님께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 속에는 ‘그들도 부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편의상 우리가 말을 하자니 중생이라는  말을 잠깐 붙여서 쓸 뿐입니다.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여성에게 사람들이 ‘ 저사람은 여자가 아니야’ 이런 표현도 더러 씁니다.  ‘여자가 아니야’라고 하는데 꼭 아닌 것도 아닌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이 들리지만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태도입니다.

     


    何以故須菩提衆生衆生者는  如來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중생중생자는 여래가 설비중생일새 시명중생이니라


    설비중생 시명중생(說非衆生 是名衆生)이라는 말을 즉비중생 시명중생(卽非衆生 是名衆生)이라도 바꿔도 좋습니다. 말이 조금씩 달라도 뜻은 똑같지요.

    ‘여래가 설하기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이 아닐새 이 이름이 중생이다.’

    이 대목에 과거에 깨달으신 조사스님들이 주석을 달기를, ‘모두 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인 것을, 그래서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라고 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육조 혜능스님이나 야부스님같은 뛰어난 이들의 훌륭한 주석서가 금강경 주석서로써 무수히 많습니다. 고래로부터 전해지는 뛰어난 주석서를 곁들여서 공부한다면 금강경 맛을 더욱 깊이 있고, 폭넓게 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깊어지지요.

    부처님 설법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나서 여기서는 중생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중생이라는 것도 이 즉비의 논리라고 하는 범주속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지요. 부처도 즉비의 논리에 들어가는데 중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야. 이 이름이 중생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논리를 일상생활에 많이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사 깊은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해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살자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라고 고정시켜 놓으면 그 테두리 안에갇히게 됩니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이지요. 절대 틀로써 규정하지 말고, 그 틀을 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틀 속에 갇힐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자녀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나는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어’‘나는 이렇게 밖에 못 배웠어’‘나는 팔자가 이래’하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 라고 하는 이 큰 법문에서 우리가 그런 틀을 과감히 깰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규정하는 틀부터 깨야합니다. 그런 다음 자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남편에 대한 고정관념, 아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나아가 모든 이웃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면 정말 달리 보입니다.

    ‘웬수가 아니라 부처님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내 시각이 어떠한가에 달린 것이지 그 대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이런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내 시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동안 병들어 있던 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 그래서 어떤 색안경도 나에겐 이제 없다라는 태도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색안경이란 것을 떠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존재와 모든 대상을 투명하게 볼 뿐이다’ 하는 안목이 되어야 합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8강 무법가득분 제22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無所得耶니이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라 須菩提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제22, 법은 얻을 수 없다[無法可得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신 것은, 얻은 바가 없음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나의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어떤 것도 얻은 바가 없다. 다만 그 이름이 최상의 깨달음일 뿐이니라.”


    얻을 것이 없는 법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전통적으로 ‘법 가이 얻을 것이 없다’ 라고 해석합니다.

    한문에서 가(可)자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법은 쉽게 표현하면 최상의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법을 얻는다. 법을 깨닫는다.’얼마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그렇게들 표현 합니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법중에는 제일 큰 법이지요. 이것 때문에 불교가 존재합니다. 불교인들의 궁극적 목표는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최상의 깨달음도  즉비의 논리에다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無所得耶니이다

     

    수보리가 백불언 하사대 세존이시여 불이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위무소득야니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부처님이 얻으신  최상의 깨달음은 얻은 바 없음이 됩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동안 불교의 중요한 명제들을 전부 등장시켜서 거론해 왔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최상의 깨달음이라면 최고의 입장인데 이것마저도 없는 입장이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라

     

    불언하사대 여시여시하니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사대 ‘그렇다 그렇다’ 여시여시는 ‘이와 같고 이와같다’는 뜻이지요.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끝에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세계입니다. 눈에 비치는 현상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세계마저도 얻은 바가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須菩提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無有少法可得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야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무유소법가득일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최상의 깨달음 내지 그 외 다른 여러 가지들도 눈꼽만큼도 얻을 것이 없다.’

    최상의 깨달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 열반이 됐든지 자비가 됐든지 지혜가 됐든지 ‘그 어떤 것도’ 라는 뜻에서  ‘내지(乃至)’라는 말을 썼습니다. 어떤 것까지도 하는 조금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불교에 이렇게 시간도 돈도 많이 투자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차원 낮게 이해하기로 하면 참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또 여기 금강경에서만 무소득이 아니라 반야심경에서도 이무소득(以無所得)이라고 했지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로 하면 그 정신적 수준이 상당히 높아야 그 맛을 느끼고 어떤 법희선열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것에서 법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 얻는 데서 또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얻은 것이  몇 푼어치나 되겠습니까.

    이 장에서는 깨달음과 여타 그 외 다른 모든 것까지도 가히 얻을 것이 없을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열반하신 경봉 큰스님께서 이런 법문을 많이 하셨어요.

    스님은 금강경을 좋아하셔서 이런 법문을 하도 많이 하시니까 어느날 한 신도가 큰스님 문앞에 와서 ‘큰스님 계십니까’하는 것이 아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하고 여쭈었습니다.

    큰스님의 법문 내용이 주로 그런  말씀이까 그 말씀이 바로 큰스님인 것이지요. 그런 인사를 듣고 경봉스님이 환희심이 나서 그 이야기를 법상에서 하시는 것을 제가 바로 밑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라고 신도님이 경봉스님을 부른 것은 그만치 경봉스님을 이해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경봉스님이 기분 좋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이제 금강경에서 20여 회에 걸쳐서 즉비의 논리로 모든 문제를 거론했어요. 앞에서 봐왔듯이 중생의 문제, 부처의 문제,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의 문제, 설법의 문제, 심지어 최상의 깨달음의 문제까지 거론했으니 갈 데 까지 간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뤘습니까. 태자의 지위를 던져버렸고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얻으신 것이 소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최상의 깨달음인데 이것마저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라고 과감하게 깨뜨리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집착마저도 깨뜨려버리고, 깨달음의 흔적에서도 시원스럽게 벗어나버리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내가 쌓아놓은 업적이라고 할까, 공로라고 할까, 평소에 잘한 일, 이런 것을 그렇게 생색내고 집착해서 나를 거기다 올려놓고 내세운다고 하는 게 얼마나 소인의 짓인가, 얼마나 쩨쩨하고 하찮은 일인가 하는 반성을 우리가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좀더 마음이 커지고 부처님의 정신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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