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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9강-정심행선분 제23/복지무비분 제24불교/금강경 2014. 11. 5. 16:43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9강 정심행선분 제23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제23, 텅 빈 마음으로 선행을 하다[淨心行善分]
“또 수보리야, 이 도리는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이 이름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는 경지에서 여러 가지 선법을 닦으면 곧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보리야, 이른바 선법이란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다’라고 하느니라.”
관념을 떠난 선행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텅 빈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정심(淨心)은 청정한 마음입니다. 청정한 마음이란 얼른 생각하기에 ‘탐진치 삼독을 떠난 마음’ 또는 ‘착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 ‘텅 빈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空)한 마음이지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런데 늘 흔적이 남고 자취가 남고 미련이 남아서 스스로 그것을 자랑하거나 급기야는 생색까지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텅 빈 마음, 공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면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하는 마음과 자취가 안남지요. 그것이 진짜 선을 제대로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속에서 일어나는 상을 어쩔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참아서 밖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만도 상당합니다.
억지로든 자연스럽게든 텅빈 마음으로 선을 행했을 때 아무리 작은 공덕이나 선행도 상당히 큰 빛을 발합니다. 두고두고 내 마음의 창고에 항상 쌓여 있습니다.
이것이 정심행선(淨心行善)입니다.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부차수보리야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일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또 다시 수보리야 수보리를 여러 번 불렀으니까 부처님도 좀 미안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또 부르는 것이지요.
다음 대목에 금강경에서 아주 멋진 말이 나옵니다.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일새’
‘이 법은 평등해서 고하가 없다.’
금강경에서 이 구절 하나만 건져도 공부한 보람이 있습니다. 법은 모든 존재,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진리, 이치입니다. 그것이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필과 만년필도 평등한 것이고 남자와 여자도 평등한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도 평등한 것이지요.
모든 것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우리는 공연히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을 차별하여 떠올리고 나이든 사람, 젊은 사람도 차별로 생각합니다. 나이들면 나이든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말 평등합니다. 우리가 계산해서 잘산다고 하는 사람과, 우리가 계산해서 못 산다고 하는 사람이 사실은 평등한 것입니다.
제 개인의 입장을 조금 말씀드리면 어려서 같은 무렵에 강원생활이나 중노릇을 시작하던 도반들이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크게 한 일도 없고, 수행자답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형편없이 사는 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까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정말 재미있게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이 법이 좋아서 열심히 정진하고 공부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그런 것이 없는 반면에 개인적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아주 즐겁고 재밌는 일이 많았을 것이예요. 계산해보니까 토탈하면 똑같더라고요. 평등한 것이지요.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라’
아주 멋진 말입니다. 이어 부처님은 이 이름이 바로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도리를 알면 그것이 최상의 깨달음인 것이지요.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로 수일체선법하면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라
자아의식[我相]도 없고, 차별의식[人相]도 없고, 열등의식[衆生相]도 없고, 한계의식[壽者相]도 없는 마음자세로써 선법을 닦을 때 나니 너니 하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의식[相]이 사라진 상태에서 선법을 행할 때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것이지요.
상안내는 관계, 조건이 없는 관계로 제일 이해하기 쉬운 관계가 부모와 자식관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경우,부모자식간에도 조건이 붙습니다. 무인 무아 무중생 무수자가 안되면 부모자식간에도 조건이 붙지요. 또 부모 자식간에 하는 일이 무슨 좋은 일[善法]이 되겠습니까. 크게 잘하는 일이라고 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상을 많이 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이 텅빈 마음으로 선법을 행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아 선법 좋지’ 하고는 선법에 집착하고 선법에 눈을 돌립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또 선법이라는 것에 집착을 많이 하거든요.
사람들이 집착하는 습관, 물고 늘어지는 습관이 무섭습니다. 마치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삽살개는 돌을 쫓아가서 물려고 하는 습관과 같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부처님께서 그런 집착을 과감히 깨어 주기 위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수보리야 소신선법자는 여래가 설즉비선법일새 시명선법이니라
‘여래가 설하기를 곧 선법이 아닐새 말을 하자니 이름이 선법이다’ ‘선법이라고 해서 그렇게 껌뻑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구나 선법에 관심쓸게 없구나’ 이렇게 이해해도 치우친 소견입니다.
중도적인 소견이 중요하지요.
‘선법을 이해하되 선법은 선법이 아니고 이 이름이 선법이다’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선법을 행하면 어디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이해가 있다면 선법을 행하게 되면 행하고, 선법을 행하지 않아도 아무 마음에 갈등이 없지요. 행해도 아무것도 마음에 남지 않고, 자랑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여여하고 태연자약합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금강경은 “즉비(卽非)”라고 하는 단 두글자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만 이해해도 금강경을 한 80% 이해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즉비다. 남자도 즉비, 여자도 즉비, 선법도 즉비, 불교도 즉비, 기독교도 즉비, 먹는 것도 즉비, 일체가 즉비 아닌 것이 없다.'
즉비를 이해하면 금강경 핵심을 상당히 이해한 것이 됩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9강 복지무비분 제24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의 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하고 若人이 以此般若波羅蜜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於前福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百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제24,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
“수보리야, 예컨대 삼천 대천세계에 있는 산중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만한 금은 보화의 무더기를 가지고 만약 어떤 사람이 널리 보시하였다 하자.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이 반야바라밀경에서 네 글귀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해설하여 준다면, 앞의 금은 보화로써 보시한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의 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산수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경전 수지가 최고의 복덕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복과 지혜는 비교가 안된다’ 하는 말입니다.
복과 지혜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무엇보다도 지혜가 우선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어도 복은 많을 수가 있어요. 대개 아마추어 불교인들이 지혜는 뒷전이고 복을 우선으로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초보불자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복이 있고 없고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복도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이 따라 옵니다. 이렇게 되어야 순리이지요. 그래야 또 그 복이 자기 것이 됩니다. 복만 자꾸 앞세워서 생각하면 우선은 어떻게든 복이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것이 못되지요. 말하자면 억지로 온 복은 다른 데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지혜와 자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자비는 지혜를 바탕으로 합니다. 지혜 없는 자비는 대개 정에 떨어지고 말아서 자비가 아니지요.
須菩提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의 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하고
수보리야 약삼천대천세계중소유제수미산왕의 여시등칠보취를 유인이 지용보시하고
삼천대천세계는 지구라고 해석하면 되지요. 소유제수미산왕(所有諸須彌山王)은 있는 바 큰 산들입니다. 수미산이란 크다는 뜻입니다. 뒤에 왕이라고 붙인 것은 수미산이 산중에 제일 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수미산이 한 두개가 아닌데 그 많고 많은 수미산들의 무더기와 같은 동등한 칠보의 무더기.
수미산 대신에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남산이라는 말을 넣어보면, 어떤 사람이 저 남산만한 칠보의 무더기를 가지고 보시에 사용했다면, 하고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런 비유는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지요.
若人이 以此般若波羅蜜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약인이 이차반야바라밀경으로 내지사구게등을 수지독송하야 위타인설하면
여기서 반야바라밀경은 금강경을 말합니다. 내지사구게라고 했는데 내지라는 말속에 금강경전체가 포함되지요.
어떤 사람이 이 금강반야바라밀로서 금강경 전체이거나 내지 사구게등을 가지고 다니고, 또는 마음에 지니고 다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줄 것 같으면 그랬습니다. 손으로 지니는 것도 수지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도 수지입니다.
於前福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百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어전복덕으로 백분에 불급일이며 백천만억분과 내지산수비유로 소불능급이니라.
전복덕(前福德)이란 앞서 말한 복덕입니다. 여러 개의 수미산왕만한 칠보의 무더기로써 사람들에게 보시한 것을 말하지요. 그 복은 금강경 내지 금강경 사구게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위타연설 하는 복덕의 백분의 일도 못된다는 것입니다. 또 백천만억분의 일도 못되고 어떤 이야기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큰복이라는 것이지요. 앞서 지경공덕분 같은 데서도 금강경 이치나 진리에 대한 가치를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구체적인 비교를 합니다.
값나가는 금은보화 칠보무더기로서 보시한 것은 물질을 가지고 보시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의 복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인연이 되고 씨앗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보시를 할 때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지 말고, 불교공부를 잘해서 물질을 지혜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가 됐든지 그것을 지혜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 법으로써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그냥 물질을 물질로만 써버린다면, 예를 들어서 만원을 보시했으면 만원어치의 공덕이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했을 경우지요. 잘못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됩니다. 보시 해놓고 생색내고 자랑하고 유세한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지요. 그런 생색없이 순수하게 잘했다고 해도 물질을 물질로만 보시하면 단순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만원이 되었든 자기노력이 되었든 그것을 가지고 법보시, 법공양으로 전환해서 백만원, 천만원, 수억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 예입니다. 부처님은 당신 80평생을 오로지 법공양에만 썼습니다. 법보시하는 데 썼지요. 그런데 똑같은 일생을 살면서도 그저 사업만 하고 재산만 늘리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과보 그 결과밖에 못 받습니다.
같은 일생을 가지고도 우리가 비교해보면 알 수가 있지요.
단순한 물질로 보시하는 길과 그 물질이 법으로 전해지도록 의미있게 보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간혹 저에게 금전적인 보시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에는 겁이 나서 잘 받지 못했습니다. 극구 사양을 했는데 근래에는 잘 받습니다. “법공양 하는데 잘 쓰겠습니다.”라고 꼭 말하고 받지요. 나는 심부름을 하는 것이니까 좀 수고스럽지만 그 수고를 통해서 그 분이 쓸 것보다 내가 더 잘 써준다고 하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채널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이 하더라도 만원이 백만원이 되고 천만원도 되고 억도 될 수 있는 보시의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십시오. 같은 80생을 살았는데 진리의 길로 가셨기 때문에 많은 중생들에게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이익을 우리에게 물려주는 것이지요. 그것만 보더라도 같은 돈이라도 돈의 가치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간혹 ‘동타지옥 간다’는 말을 합니다. 제대로 쓰지 못할 사람에게 보시를 하면 나쁜 길로 같이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시하고 복 짓는 것도 줄을 잘서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선행을 하고 복을 짓는 것도 제대로 올바른 입장이 있습니다. 어떤 보시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집니다.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금강경에 여러 번 나오지요. 다른 경전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들의 관심사가 온통 복에 가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지혜를 강조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근본입니다. 근본인 뿌리가 잘 살도록 해야지요. 그랬을 때 줄기가 뻗고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우리 불자들은 한결같이 지혜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복지무비분에서 역력히 보여줍니다.
출처 : 염화실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메모 :'불교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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