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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4강-능정업분 제16불교/금강경 2014. 11. 5. 16:40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4강 능정업분 제16
能淨業障分 第十六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則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에 於燃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니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須菩提야 當知是經義는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제16, 업장을 깨끗이 맑히다[能淨業障分]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전생(前生)의 죄업으로 반드시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생(今生)에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곧 바로 소멸하고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 연등(燃燈)부처님 이전에 팔백 사천만 만 억 나유타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다 공양을 올리고, 받들어 섬겼느니라.
만약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末世)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그가 얻은 공덕은 내가 저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천 만 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산수와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다음 말세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이가 있으면, 그가 얻은 공덕을 내가 만약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져서 의심하며 믿지 아니할 것이다.
수보리야, 반드시 알라.
이 경의 이치는 상상할 수가 없으며, 그 과보(果報)도 역시 상상할 수 없느니라.”
업장을 맑히는 공덕
능정업장(能淨業障)은 ‘능히 업장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깨끗할 정(淨)자는 불교에서 ‘비운다’‘공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서 때 묻은 옷을 빨래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없애는 것이지요. 옷마저 없어진 상태가 청정, 정, 또는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업도 ‘업장을 완전히 비워 버린다. 공하게 한다’ 는 뜻이 됩니다.
소승불교나 저급한 불교에서는 업장문제를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업장소멸, 죄업소멸 이런 말을 많이 쓰고 참회법회나 업장을 소멸하는 특별한 의식 같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업장소멸에 금강경 외에 달리 다른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금강경 하나면 업장을 텅 비우고 없애는 데 최고이고, 이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없다는 것이지요.
업장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금강경 공부를 잘 하고 금강경을 많이 독송하고 많이 사경하는 것이 업장소멸의 최고 특효약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則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부차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수지독송차경호대 약위인경천하면 시인이 선세죄업으로 응타악도언마는 이금세인이 경천고로 선세죄업이 즉위소멸하고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라
불자들은 ‘금강경은 참 대단한 경전인데 이 경전만 외우면 돈도 많이 생기고 대접도 받고 어디가서 존경받고 뭐든지 내 뜻대로 되리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금강경 같은 수준의 경전에 심취하고 그것을 좋아하고 거기에 묻혀있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적자(嫡子)이고 맏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경전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벼이 여기고 천하게 여기는 바가 될 것 같으면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금강경을 잘 공부하고 잘못 공부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금강경을 공부하는데 집에서나 친구들사이에서나 세상에서 사람대접을 못받을 경우를 말하지요. 그런 경우 이 정도로 천시받고 남으로 하여금 비웃음 사는 것도 내가 지난 생에 큰 죄를 지어서 분명히 악도에 떨어져야 하는데 이만큼 받는 것이며. 이것으로써 내 업장이 완전히 깨끗하게 소멸된다 하는 것입니다. 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고생하는 좋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하지요. 금강경 덕에 지금만치라도 사는 것이고 이렇게 천시 받음으로써 먼저 세상에 지은 죄업들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지요.
오직 금강경으로써 모든 사찰의식을 대신하는 절도 있습니다. 불공할 때도 금강경을 외우고 영가천도를 지낼 때도 금강경을 외웁니다. 천수경도 안 외우고 오직 금강경입니다. 좋은 일이예요. 천수경보다야 금강경이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이 구절만 보아도 금강경에 대해서 충분이 믿음이 가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천시도 받고 무시도 당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대접받을 만한 덕을 쌓지도 못했는데 대접을 받는다든지 칭찬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근거 없는 비난을 듣는 게 훨씬 낫습니다. 불자들이나 덕을 닦고 지혜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3정도의 공로를 가졌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5로 7로 20으로 부풀려서 추앙하고 칭찬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은 공을 다 까먹는 일이지요. 차라리 근거 없는 비난은 군자가 택할 바이고 불자가 택할 바입니다.
금강경의 주해서는 예부터 수백가가 넘고 53가해라는 주석서도 있습니다. 금강경의 같은 구절을 쉰 세분이 각각 달리 해석한 것을 하나의 책으로 편집한 주석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금강경5가해라고 해서 다섯 분 큰 스님들의 주석서가 전해져 있어요. 이 대목에서 ‘나는 잘못도 안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저렇게 비난한다’고 할 때 불자들은 ‘근거없이 비난을 듣는 이 순간에 내 업장이 얼마나 소멸되는가 정말 다행이다 저 사람들이 내 업장을 소멸시켜준다’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고 설명하시는 조사스님들의 주석서가 많이 있습니다. 공감가는 이야기지요.
다음 구절에 보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천시당하는 것이 업장만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최상의 깨달음을 마땅히 얻을 것이라고 했으니 죄업소멸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사업이 안된다 공부가 안된다 인덕이 없다고 하면서 죄업이니 업장이니 하는 말을 합니다. 과거에 업을 많이 지어서, 업장이 두터워서 하는 소리도 흔하게 하지요. 금강경을 인연으로 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말이나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면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에 於然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니라
수보리야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에 어연등불전에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실개공양승사하야 무공과자니라
‘수보리야 내가 기억하건대 한량없는 아승지겁 연등 부처님 이전에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을 만나서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서 헛되이 지나친 분이 한 분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염(念)자는 기억한다는 뜻이고 득치(得値)는 만났다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600년 전 인도에 태어나셔서 6년 고행하시고 성도해서 성불하신 분으로 역사가 증명하는 부처님입니다. 과거 연등불은 다른 경전에도 등장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를 준 부처님이지요. 그 연등불 이전에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을 만나서 부처님은 이 모든 제불께 공양올리고 받들어 섬기고 존중찬탄했다는 것입니다. 연등불이 실존했든 안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이라고 하는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어떻게 나왔는가 이해하고 넘어가야합니다.
대승경전에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 ‘무량제불’ 등의 표현을 하는 근본취지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로 보는 데 있습니다. 과거의 부처님, 현재의 부처님, 미래의 부처님을 모두 말하는 것이지요. 그 부처님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그러한 숨은 뜻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나올 경전의 가치와 비교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수많은 부처님께 공양올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약부유인이 어후말세에 능수지독송차경하면 소득공덕이 어아소공양제불공덕으로 백분에 불급일이며 천만억분과 내지산수비유로 소불능급이니라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할 것 같으면 얻은 바 공덕이 부처님이 제불에게 공양한 바의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어후말세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로 보아도 좋지요.
불상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일 뿐인데도 우리는 불공올리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것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그 앞에서 축원을 할 때도 꼭 분명하게 들리도록 ‘누구누구 보체’라고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고 아는 불자들도 적지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신앙이지만 늘 그러한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과 비교할 것 같으면, 부처님께서 그 많고 많은 부처님께 공양올린 공덕이 백분의 일, 천만억분의 일도 안되고, 산수비유로도 계산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진정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를 제대로 소화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무엇무엇을 잔뜩 올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지만, 불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불교를 믿는 바른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되겠지요. 경전공부는 그렇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간혹 저는 ‘자기 불교 보따리’라는 표현을 하는데 한국불자의 수준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자기식 불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집에서 자기가 만든 불교 보따리를 싸서는 절에 올 때도 그 보따리를 그냥 들고 옵니다. 법사가 무슨 말을 하든, 경전에 무슨 말이 있든 알 바 없고 자기가 싸놓은 보따리를 풀러놓고 한껏 자기수준대로 하다가 돌아갈 때 고스란히 또 그 보따리를 들고 내려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도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수보리야 약선남자선여인이 어후말세에 유수지독송차경하는 소득공덕을 아약구설자면 혹유인문하고 심즉광란하야 호의불신하리라
어후말세라고 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하고 독하고 송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얻는 바 공덕을 부처님이 만약에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설명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곧 광란해 버리고 호의불신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앞에서 예를 들어 삼천대천세계의 금은보화 무더기를 보시한 것보다도 금강경이 더 훌륭하다고 하였고 심지어 이 몸을 아침과 점심 저녁에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보시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금강경이 더 위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교를 하면서 경전의 공덕을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다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안 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 공덕을 다 이야기 하면 듣는 사람이 곧 미쳐버린다는 것이지요. 호(狐)자도 의심한다는 뜻이므로 호의불신이란 아주 의심하고 의심해서 믿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도 안 믿고 부처님의 말씀도 안 믿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저런 말씀을 하다니 부처님이 아니라 무슨 마구니가 부처의 형상을 지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인가’ 이렇게 까지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이야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금강경의 의미가 얼마나 깊고 깊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須菩提야 當知是經義는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당지시경의는 불가사의며 과보도 역불가사의니라
‘수보리야 이 경전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과보도 역시 불가사의 하다’고 하였습니다. 뜻이 얼마나 깊고 깊은지 생각으로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대로 알려면 직관으로 알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헤아리고 사량분별하고 이것 저것 계산하여 아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지만 그런 사량분별을 초월해서 직관으로 알 수 있어야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하는 말은 금강경에서 주로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인데 불자들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계산할 필요없이 ‘그렇지. 중생이라고 비록 말은 하지만 사람사람의 그 존재가치는 너무나도 위대하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부처라고 표현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라고 금세 알아야 합니다. 사량분별하지 않고 직관으로 알 수 있어야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이 경전은 뜻이 불가사의 하니까, 그 불가사의한 경전을 우리가 공부할 것 같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도 역시 불가사의 합니다. 결과나 공덕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소명태자가 ‘업장을 소멸한다’는 의미로 능정업장이라고 이 단락의 제목을 지었습니다.
업장을 소멸하는데 금강경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없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 그 경전의 공덕을 설명하면서 ‘내가 만약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다 이야기 하기로 하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고 마음이 오히려 미쳐버릴 것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경의 의미도 불가사의하고 그에 따른 과보도 불가사의하다고 하였지요.
업장소멸을 철저히 믿고 이해하도록 경전의 공덕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가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그동안 업장이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에 걸렸는데 아 됐다, 금강경 하나만 평생 수지독송하고 사경해야겠다’하는 마음자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출처 : 염화실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메모 :'불교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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