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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2강-이상적멸분 제14(2)
    불교/금강경 2014. 11. 5. 16:39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2강 이상적멸분 제14(2)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응생무소주심이니라


    에 나온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구절과 닮은 내용입니다. 여타의 경전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한 가지 주제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면, 금강경은 길이가 길지 않은 경인데도 어떤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표현도 강합니다.  ‘반드시, 틀림없이’라는 뜻의 응(應)자도 많이 나옵니다.

    이 문장에는 불응이라고 하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불자로서, 보살로서 차원높은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응당히 어떤 사물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 응당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어떤 방향으로든지 항상 흘러가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어딘가에 머물러서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구름 흐르듯이 흘러가도록 두라는 것이지요.

    금강경의 여러 구절들은 우리 일상에서 삶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은데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生無所住心]’하는 구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가 나를 배신했으니, 의리가 없느니 하고 안달합니다. 그런데 흘러가는 것은 그 사람의 삶입니다. 나도 그렇게 흘러가고 남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스스로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 나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흘러가고 달라져 갑니다. 그런 것이 삶이라면 자기를 비춰서 남도 그렇게 이해해야지요.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若心有住卽爲非住是故佛說菩薩心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약심유주면 즉위비주니 시고로 불설보살은 심불응주색보시라하니라


    마음은 머물렀다고 할 때 벌써 흘러가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모든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의 삶 중에서 가장 근본인 베푸는 삶, 보시에 대해서도 응당히 어떤 사물내지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했건 했다고 하는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須菩提菩薩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위이익일체중생하야 응여시보시니라.


    보살이 보시를 하는 것은 진정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에게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베푸는 것입니다. 봉사단체에 가서 노인들의 목욕을 시켜드린다거나 빨래를 해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 밥 한끼, 책 한권, 염주 하나를 선물하는 것도 모두 보시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려고 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보시를 할 때 응당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해야 합니다.

    보살의 삶은 베푸는 삶이니까 보시라는 말을 자꾸 합니다. 보시는 그대로 삶입니다. 보살이나 불자나 좀 더 뜻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이지요.

     

    如來說一切諸相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則非衆生이니라


    여래가 설일체제상이 즉시비상이며 우설일체중생이 즉비중생이니라.


    금강경에 즉비라는 말이 스무 번 이상이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도 즉시비상과 즉비중생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체제상이라고 하는 모든 상이 즉시비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상은 없는 것인데 없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상이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라면 누구나 공히 똑같은 양의 상을 내야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해놓고도 상을 좀 덜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독 상을 많이 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고정된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만일 상이라고 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부처님도 그렇게 ‘상을 떠나라’‘상을 내지 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한 일체상은 곧 상이 아니며 덧붙이면 그 이름이 상일 뿐입니다. 시명상이지요. 말을 하자니 상이고, 편의상 상이라 이름 지어놓고 부르는 것이지요. 상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쩌다 우리가 상을 좀 내더라도 크게 두려워 하거나 후회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성인이나 부처님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우리는 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중생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그러나 편의상 우리가 중생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부를 뿐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모두 부처지요.

    불교 밖에서는 아예 중생이라는 말도 안 씁니다.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사람일 뿐입니다. 중생이 즉비중생인 이유,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동안 공부해온 것으로써 얼마든지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지요. 중생이라고 하는 말에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須菩提如來是眞語者實語者如語者不誑語者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시진어자며 실어자며 여어자며 불광어자며 불이어자니라


    부처님이 모처럼 당신이 하시는 말씀의 진실성에 대해서 이렇게 다섯 번이나 간곡하게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이 이름이 중생이다’ 불교 초보자는 이런 말을 듣고 의아해 합니다.  부처님은 그동안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고 했고, 깨달음이 깨달음이 아니고 이름이 깨달음이며, 설법이 설법이 아니고 이름이 설법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전생의 수기 역시 그 이름이 연등불에게 수기 받은 것이라고 하였지요. 이렇게 엄청난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그 이름이 무엇이다’ 라고 하였으니 초보불자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해가 안 가서도 못 믿지만, 자신을 저급하게 취급하고 꼭 참회를 하고 어디엔가 죄를 빌어야 하는 중생이라는 집착에 너무 굳어져 있어서 이 모든 말들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중생들의 이러한 모습은 부처님이 통탄할 일이고 가슴을 칠 일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다[是眞語者]’‘실다운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實語者]’ ‘진리와 똑같은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如語者]’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誑語者]’ ‘사실과 다르지 않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異語者]’라고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는 모두 같은 뜻인데 표현을 달리 했을 뿐입니다. ‘나의 말이 얼른 이해가 안되거든 무조건 믿고 따르기라도 하라’는 뜻에서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須菩提如來所得法此法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야 여래소득법은 차법이 무실무허하니라


    부처님이 얻으신바 법은 연등불에게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출가하여 6년 고행을 하시고 보리수 아래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여래의 소득법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입니다. 저는 그런 표현을 잘 쓰는데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최대의 사건인가, 모든 인간이 죄 많고 업장 많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인간이 모두가 부처이고 모두가 하느님이고 모두가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처님이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래가 얻으신 법이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과거에 가신 인류나 현존하는 인류나 미래에 올 인류 전체가 부처의 격으로 상승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본래가치를 증명한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부처님 같은 성인은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대로 부처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바로 본 것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성인이라고 하지요. 그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거나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가르치는 성인은 온전치 못한 성인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방편이거나 인간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가르친다면, 결코 성인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 고려청자가 있는데, 이 가치를 모르고 모조품이라고 한다든지 엉터리 그릇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도자기 전문 감정가가 못 됩니다. 제대로 감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전문적으로 감정한 사람은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전문적으로 감정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고,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하고, 종이라고 비하합니다. 고려청자를 가지고 엉터리 그릇이라고 보는 것과 같지요. 이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불교가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사실을 빨리 깨닫고 만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신이 발견한 그 깨달음마저도 무실무허라고 하였습니다.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는 것이지요. 깨달음마저도 깨달았다고 하는 관념에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투쟁을 하였습니다. 왕자의 지위를 버렸고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런데 그 깨달음이 실다운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무실무허라는 말은 천하의 명언입니다. 이 말을 우리 일상에 원용해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무실무허야, 실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야’라고 한다면 곳곳에 다 적용이 됩니다.

     


    須菩提若菩薩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入暗則無所見이요 若菩薩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有目하야 日光明照見種種色이니라


    수보리야 약보살이 심주어법하야 이행보시하면 여인이 입암에 즉무소견이요 약보살이 심부주법하야 이행보시하면 여인이 유목하야 일광명조에 견종종색이니라


    이 구절은 금강경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명언 중에 명언이지요.

    ‘만약에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캄캄한 어둠속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심주어법 할 때의 법은 모든 대상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조건을 붙이고 이유를 붙이고 대가를 바랍니다. 마음에 집착함이 있는 것이지요. 자리를 앉히는 것만 해도 나와 가까운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히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본척만척 해버립니다.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조건과 이유를 다는 것은 마음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면서 행하는 보시는 밥 한 숟가락이나 종이 한 장과 같이 아주 작은 보시라고 하여도 그 결과가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러 교실에 왔는데,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면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계단이고 담벼락이고 전봇대에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쳐서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어떤 조건, 어떤 이유, 이런 것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만약 어떤 보살이 마음을 어떤 조건이나 이익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눈도 아주 밝은 눈이 있고, 태양빛도 환하게 잘 비추어서 가지가지 사물을 다 분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만에서 자제공덕회를 이끄는 증엄스님은 이 시대의 관세음보살이며 성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분의 일화 중에 교회가 없어서 예배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안타까와하여 교회를 지어준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는 마음속에 이미 나다 너다 불교인이다 기독교인다 하는 분별과 차별을 떠난 보시입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어디에 도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사람, 베푸는 사람입니다. 궁극에는 우리 불자들이 모두 그러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한다면 어렵지만 한 생각 돌이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지혜에 의해서, 특히 금강경의 지혜에 의해서 마음에 조건을 달지 않고 이유를 달지 않고 내키는 만치 베풀고 거기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밝은 눈이 있고, 태양빛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있으니 계단이 아무리 좁고 험하더라도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잘 오르내립니다. 도로에 차가 아무리 씽씽 달려도 빛이 있으면 그 차를 잘 피해서 다닙니다. 아무리 의자가 빽빽한 곳에서도 빛이 있으면 자기가 앉을 자리를 잘 찾아서 앉지요. 그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지혜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빛이 바로 지혜이지요.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지혜가 있을 때 자비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지 지혜가 없다면 자비 역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지혜가 우선입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온갖 것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온갖 것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밝은 눈도 있고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사물들을 분별하여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이 대목 속에 저는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보시라고 표현했지만 꼭 보시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보시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일체 행위가 다 포함됩니다.

    지혜가 없다면 무슨 일을 해도 캄캄합니다. 상처투성이 인생이 됩니다. 집착하는 것이 바로 지혜가 없는 것이지요. 조건을 달고 별별 ‘ 때문에’라고 하는 이유를 붙이는 것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상처가 많은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자식 때문에,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형제 때문에, 집안 때문에 ,부모 때문에 등등 별별 ‘때문에’ 라는 이유를 붙이지만 모두 아닙니다. 단 한가지 이유는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 것 뿐입니다. 그 외에 달리 이유를 붙일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혜만 있으면 내가 사는 주변상황이 어떻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듯이 눈도 밝고 태양빛도 밝아서 모든 사물들을 환하게 분별하면서 내 인생을 가는 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고 순리 따라서 자기 분 따라서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교훈입니다.

     


    菩提當來之世若有善男子善女人能於此經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以佛智慧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약유선남자선여인이 능어차경에 수지독송하면 즉위여래가 이불지혜로 실지시인하며 실견시인하야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하리라


    당래지세는 불멸후 제1오백년이 됐든, 제5오백년이 됐든 간에 앞으로 오는 세상을 말합니다. 오는 세상에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그 사람들이 모두모두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는 사실을 다 보고 다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와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앞서 ‘심주어법 이행보시하면 여인입암 즉무소견이고 심부주법 이행보시하면 유목하여 일광명조에 견종종색이다’라고 하는 엄청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다고 할 때 이 경전은 금강경 전편을 뜻합니다만 특히 앞서 말씀하신 이 대목을 뜻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따로 떼놓고 봐도 너무 좋고 근사합니다. ‘집착이 있으면 캄캄하고, 집착이 없으면 환하다’ 는 말씀은 곧바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열쇠입니다. 이 간단한 열쇠만 있으면 우리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구절 끝에 한 번 더 금강경의 위대함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누가 몰라줘도 걱정하지 마라 여래인 내가 다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래는 이천 육백년 전의 석가모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이해해 준다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옆집에 사는 보통 사람도 다 알아줍니다. 제3자의 입장이 되면 누구에게나 부처의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일이니까 캄캄하지요. 남의 일 같으면 환하게 압니다. 정작 자기 일에는 캄캄한 사람도 남의 일 훈수 두는 데는 잘 둡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3자의 입장만 되어버리면 우리는 곧바로 부처의 입장, 부처의 지혜를 가질 수가 있어요. 자신의 일에도 제 3자의 입장이 되어서 ‘남의 일이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자기 일을 저렇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지요. 우리에게 당면한 일이나 애착하는 자기 가족의 일도 한번씩은 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보는 훈련을 한다면 좋은 안목, 좋은 해결책, 좋은 열쇠가 떠오릅니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2600년 전 석가모니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제3자의 입장이 됐을 때 남의 일에 훈수를 둘 줄 아는 바로 그 안목이야말로 부처님의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상 금강반야바라밀경 상권이 끝났습니다.

    권(卷)은 말을 권자입니다. 한 발 정도 종이를 둘둘 말면 그것이 한 권입니다. 그 이상이면 간수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내용이 아니라 양에 따라서 경전을 1권 2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금강경도 짧은 경이지만 두루마리 두 권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상 하권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상권에 해당됩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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