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1강-이상적멸분 제14(1)불교/금강경 2014. 11. 5. 16:38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1강 이상적멸분 제14(1)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사 涕淚悲泣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하니다 世尊이시여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이니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則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다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則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다
世尊이시여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니이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라 何以故오 離一切相을 卽名諸佛이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가 說第一波羅蜜이 卽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일새 是名忍辱波羅蜜이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라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라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은 應離一切相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是故로 佛說菩薩은 心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金剛般若波羅密經 上 終
제14, 상을 떠난 적멸[離相寂滅分]
그 때에 수보리가 이 경을 설하심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참으로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은, 저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닦아 얻은 지혜의 눈으로써는 일찍이 이와 같은 가르치심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들으면 신심이 청정하여져서 곧 실상(實相)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일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것은 곧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이 실상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고 이해하여 받아 가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만약 앞으로 최후의 오백년 경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믿고 이해하여 받아 가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라는 상도 없고, 남이라는 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상도 없고, 수명에 대한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남이라는 상과 중생이라는 상과 수명에 대한 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떠난 사람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離一切相 卽名諸佛]”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반드시 알라 이 사람도 대단히 희유한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第一波羅密)이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인욕(忍辱)바라밀도 여래는 말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찢길 적에, 내가 그 때에 나라는 상이 없었으며, 남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수명에 대한 상도 없었노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팔과 다리가 마디마디 찢어지고 무너질 때에 그때에 만약 나에게 나라는 상이나 남이라는 상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수명에 대한 상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분노의 불을 뿜고 원한을 품었으리라.
수보리야, 또 기억해보니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生)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었을 때가 있었노라.
그 세상에서도 나라는 상이 없었으며, 남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수명에 대한 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일체의 상을 떠나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라.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야하며, 반드시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이나 그 외에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야 한다.
반드시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으면 곧 머물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보살은 마음이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여래가 말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며, 또 일체중생도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만 하는 사람이며,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말만 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며, 사실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如來所得法 無實無虛]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온갖 것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온갖 것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밝은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사물들을 분별하여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곧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에 대하여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본다.
이 사람은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남김없이 성취하리라.”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그 분량이 길어서 11강과 12강 두 회에 걸쳐서 강의하겠습니다.
관념을 떠난 열반
이상적멸(離相寂滅) ‘상을 떠나서 적멸하다’ 고 하였습니다. 금강경은 무상위종이라고 하였지요. 상을 떠나야 상이 없는 것이 되므로 이상(離相)과 무상(無相)은 같은 말입니다.
상을 떠난 상태는 아주 고요한 상태이며 적멸한 상태입니다. 적멸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발을 묶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석처럼 가만히 있다고 해서 상을 떠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누구보다 왕성하게 보시활동을 하고, 교화활동을 하고, 선행을 하되 마음에 아무런 관념이 없고 흔적이 없고, 생색을 내지 않는 삶이 상을 떠난 삶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든 상이 없이 한다면 적멸한 상태, 고요한 상태에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바다에 물결이 아무리 출렁거려도 바다는 늘 물로 있다고 하는 상태입니다. 물은 항상 적멸입니다. 바람에 의해서 이리 저리 출렁이고 파도가 칠 뿐이지요. 그러나 물의 입장에서는 늘 여여합니다. 이렇게 이상적멸을 설명드릴 수가 있습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사 涕淚悲泣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하니다 世尊이시여
이시에 수보리가 문설시경하사옵고 심해의취하사 체루비읍하사 이백불언하사대 희유하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대단히 감동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감동해도 통곡을 하는 일은 드물 것입니다. 심성이 맑은 수보리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이해하고는 통곡을 하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에 북받쳤습니다. 체루비읍이라고 하는 것은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면서 통곡을 하듯이 슬피 우는 것이지요. 수보리가 심해의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감동을 한 것이지요. 심해의취란 '뜻을 깊이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전을 이해해도 얼마만치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같은 사람이 이해한다고 해도 어제 이해한 것과 오늘 이해한 것, 금년과 내년에 이해하는 것이 다릅니다.
저도 ‘금강경 강의가 그전하고 어떻드냐’고 물으니까 ‘전혀 다릅니다’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월도 흘렀지만, 그간에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졌고 철도 들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들었을 것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해가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가 다르면 그 설명이 달라지지요. 그런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배우는 입장에 있어서도 금강경을 ‘내가 언제 배웠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은 배웠어도 또 배우고 어제 읽었어도 오늘 또 읽고 오늘 읽었어도 내일 또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정도에 따라 그 뜻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늘 외우는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을 오늘 다시 읽어도 ‘여기에 이러한 이치가 있었던가’ 하는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경전을 한시라도 손에서 놓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항상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수보리가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는 부처님께 고해 말씀하사대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을 때, 희유하다는 표현을 합니다.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이고, 드문일이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지요.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이니다
불설여시심심경전은 아종석래소득혜안으로 미증득문여시지경이니다
부처님께서 그동안 설하신 경을 많이 들어왔지만 이와 같은 깊고, 깊은 경전의 가르침은 옛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얻은 혜안으로는 일찍이 들은 바가 없다’고 수보리가 말합니다. 이렇게 뛰어난 경전은 처음이라고 탄복을 하는 것이지요.
수보리는 해공제일입니다. 공에 대한 이치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분으로서 제일가는 분인데도 금강경의 13분까지 공부하고는 ‘부처님 깨달음의 깊이는 도저히 깊이를 알래야 알 수가 없다, 거기에서 나오는 미묘한 가르침, 뛰어난 가르침은 너무나도 대단하다.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런 술회를 했습니다. ‘처음 듣는 경전입니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則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다
세존이시여 약부유인이 득문시경하고 신심청정하면 즉생실상하리니 당지시인은 성취제일희유공덕이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나 말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아주 훌륭할 것 같으면 곧 실상을 낼 것입니다.’
청정이라는 말이 훌륭하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즉생실상(則生實相)은 중요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실상을 낸다고 하니까 무슨 특별히 어떤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형상 있으면서 형상이 없는 것이고 형상 없는 데서 또 형상 있는 것으로까지 볼 줄 아는 모든 존재의 양면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 모든 존재의 중도성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을 다 수용하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가 실상입니다.
이렇게 모양 없는 어떤 모양으로서 큰 소득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성취제일희유공덕이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가는 공덕,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불교에 입문을 하고 불교 신자가 되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음으로써 여러 각도에서 많은 소득을 얻습니다. 소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금강경이라고 하는 이 수준 높은 대승경전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가 얻는 공덕은 마음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마음이 툭 터지고 그동안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세상사에 있어서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확 풀려버리고 가뿐해지고 깃털같이 가볍게 살 수 있는 마음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가장 큰 공덕이지요. 그러므로 앞서 삼천대천세계만한 금은보화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만으로도 그렇게 공덕이 많은데 금강경의 저 밑바닥까지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감동이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 것을 ‘곧 실상이 생긴다[則生實相]’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현을 하자니 실상인 것입니다. 경전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감동, 우리가 얻는 혜안, 이런 것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실상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그 무엇은 없는데 실상이라고 하는 용어를 써놓으니까 상병 들기 좋아하는 중생들이 또 실상이라고 하는 그 상에 집착할까 무서워서 다시 즉비의 논리가 나옵니다.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則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다
세존이시여 시실상자는 즉시비상일새 시고로 여래가 설명실상이니다
‘실상은 곧 실상이 아니고 이름이 실상일 뿐이다’ 실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여래가 설명하고자 편의상 만들어 놓은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을 안 붙이면 우리는 의사전달을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世尊이시여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니이다
세존이시여 아금득문여시경전하고 신해수지는 부족위난이어니와 약당래세후오백세에 기유중생이 득문시경하고 신해수지하면 시인은 즉위제일희유이니이다
수보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높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분이니까 ‘내가 지금 이 경전을 듣고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이해하고 그것이 좋아서 마음속에 받아가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500년쯤 지난 뒤의 사람들이 이런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고 수지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제일 가는 사람이고, 희유한 사람이 됩니다.’라고 부처님께 말합니다. 제일희유를‘제일가는 희유한’ 이라고 해석해도 좋고 ‘제일 희유한’이라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우리는 금강경 좋아하는 것도 뭔가 유루복을 생각하며 좋아합니다. ‘부자가 된단다’‘돈이 된단다’‘사경하면 금전이 불어난단다’‘재산이 불어난단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고 취미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나 사경하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아요. 그역시 사실은 좋은 인연이며, 결코 부정할 인연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차원 달리 생각한다면 금강경을 신해수지한 사람이란 금강경의 이치에 맞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특히 좋은 일을 했을 때 생색을 내지 않고, 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내가 지은 공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가을 하늘처럼 툭 터진 시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요. 이러한 것을 금강경에서 배워간 사람이라면 제일가는 희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후500세라는 불멸후 2500년 경의 중생이라고 하니까 현재의 우리에게 꼭 들어맞는 이야기 같아서 더 크게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불멸후 천년전 사람들이 읽었다면 ‘부처님 열반하신 지 1000년 쯤 됐으니까 우리야 그거 이해하는 데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지만 앞으로 2500년 내지 3000년쯤 흘러가서 그 때 사람들을 상상한다면, 물질이 너무 발달하고 눈과 귀를 유혹하는 세상일텐데 어떻게 이렇게 세속을 벗어난 뛰어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하이고오 차인은 무아상하며 무인상하며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
여기서 차인은 ‘금강경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금강경은 무상을 우선으로 합니다. 상이라는 것은 쪼개기로 하면 수천, 수만 가지 상이 나올 수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고 하는 네 가지 상을 이야기 하지요. 그래서 금강경을 이해한 사람은 나라고 하는 자의의식이 텅 빈 사람이며,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이 텅 빈 사람이며, 부처님이나 성인이나 훌륭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비하하는 열등의식이 텅 빈 사람이며, 나이가 몇 살이다 하는 한계의식도 다 떠나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차인이지요.
所以者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라
소이자하오 아상이 즉시비상이며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즉시비상이라
‘까닭이 무엇인가 아상이 곧 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에 너무 골똘해 있고, 말끝마다 ‘나는, 나는’하고 자기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분석하면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꾸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지요.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역시 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이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존재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이라는 것이 실재할 것 같으면 누구에게든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해놓고 어떤 사람은 상이 전혀 없고, 어떤 사람은 상을 많이 냅니다. 상이 고정불변으로 실재할 것 같으면 누구에게든지 똑같은 상이 있어야 하지요. 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상을 좀 내더라도 이런 금강경의 이치를 좀 알고 있으면 사실 걱정할 것이 크게 없습니다. 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또 크게 상을 안 내지요.
금강경의 이치를 터득하면 아상이 즉시비상이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닙니다. 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고정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가 상을 없앨 수가 있는 거예요. 실재할 것 같으면 없앨 수가 없지요. 없는 것인데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로 가설된 상이므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깨끗이 상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상 때문에 너무 걱정할 것이 없어요. 우리는 거의 모두 상내는 재미로 살고 있지만, 상이야말로 실재하지 않는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게되는 계기가 생기면 그 상들이 깨끗이 청소가 됩니다. 여기에 촌철살인과 같은 무서운 말이 한마디 나옵니다.
何以故오 離一切相을 卽名諸佛이니다
하이고오 이일체상을 즉명제불이니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내는 것이 보살의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상을 내며 사는 것이 인생을 깊이 있게 사는 삶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게 상을 상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일체상 즉명제불’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모든 상 떠난 그 자리가 곧 부처다’ 부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기준으로 해서 부처를 이야기한다면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은 만행만덕을 갖추고 무량공덕과 무량지혜를 갖춰서 만중생을 제도하는 분이십니다. 대승경전에는 부처님의 덕화를 이야기 하는 데 몇 페이지를 할애합니다. 하지만 금강경에서는 그런 것을 다 무시해버리고 ‘이일체상 즉명제불’이라고 하는 여덟 글자, 한마디로써 부처를 정의합니다. ‘상떠난 사람이 부처다’ ‘부처가 뭐 별건 줄 아느냐 상 떠난 사람이 부처다’ 다른 것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상 떠난 사람이 부처란다’ 하는 말은 큰 교훈이 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기가 어렵다 해도 이런 글귀를 걸어놓고 순간순간 마음에 새긴다면 감동을 하고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불고수보리하사대 여시여시하다.
‘이일체상이 즉명제불이다’라고 부처를 정의한 것은 수보리의 말이었습니다. 수보리가 대단하지요. 감히 부처를 정의하는데 무서운 말한마디로서 뛰어난 정의를 했어요. 곧바로 부처님은 이것을 인가해버립니다. ‘여시여시, 이와같다, 이와같다’ 하고 부처님이 수보리의 말을 인가한 것은 ‘그렇다 그렇다. 나도 몰랐는데 자네가 어찌 나를 알았지?’ 하는 표현이지요.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라
약부유인이 득문시경하고 불경불포불외하면 당지시인은 심위희유니라
수보리의 말로써 ‘일체상을 떠난 것이 여래다’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이와같다’하고 인가를 했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을 단 한마디 말로써 정의하는 것도, 부처님이 그것을 인가하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서 놀라지도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또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매우 희유한 사람이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가 說第一波羅蜜이 卽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여래가 설제일바라밀이 비제일바라밀일새 시명제일바라밀이니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는 6바라밀인데 그중에 여래가 말한 제1바라밀은 보시바라밀입니다. 그동안 베푸는 문제에 대해서 ‘상없이 베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습니다. 상없이 베푸는 삶이 보살의 삶이고 금강경에서 권유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부처님까지도 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상없이 진리의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보시 바라밀마저도 보시바라밀이 아니고 이 이름이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였습니다.
베푸는 삶에 대해서도 ‘상없이 베푸는 삶이다’‘부처님께 밥 두 숟가락을 베풀 듯이 무심히 베푸는 삶이다’ 등등의 온갖 좋은 표현을 많이 했지만 그 역시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므로 거기에도 떨어져있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 역시 관념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일새 是名忍辱波羅蜜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을 여래가 설비인욕바라밀일새 시명인욕바라밀이니라
보시가 그렇다면 인욕 역시 그렇고 지계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진,선정, 지혜 역시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수행 방편상 6바라밀이라고 하는 명제를 걸어놓고 ‘이렇게 수행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 이전의 가르침이 ‘상을 내도 좋으니 우선적으로 철저히 6바라밀을 실천하라’는 입장이었다면, 금강경에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상이 없는 수행일 때 진정한 수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욕바라밀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여아석위가리왕에 할절신체하야 아어이시에 무아상하며 무인상하며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라
부처님의 교화가 한창 왕성할 때 이웃나라 코살라국 유리왕이 부처님의 고국인 가비라국을 침범해서 석가족을 모두 죽이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광경을 모두 목도하였습니다.
맨처음 유리왕이 코살라국에 쳐들어 오는 길목에서 부처님이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서있었습니다. 유리왕이 말을 타고 가다가 부처님을 보고 내려와서 인사를 하면서 물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 무성한 숲의 그늘아래 계시지 왜 이렇게 바싹 마른 나무 가지 밑에 서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당신이 나의 고국 가비라성을 쳐들어가고 나의 석가족을 멸망하러 가는 이 순간 나의 심정은 이 타들어가는 나무와 같다’고 답하였습니다.
유리왕이 감동을 해서 군사를 물렸습니다. 두 번째도 그렇게 물렸는데 세 번째 유리왕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그 야욕을 도저히 부처님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서 자리를 피했습니다.
설사 부처님이 그 어떤 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해도 결코 통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이야기를 유리왕이라고 하는 이름을 살짝 가리왕으로 바꾸어서 금강경에 표현했습니다. 그 때의 심정을 부처님은 할절신체라 표현하였습니다. 고국 가비라성을 쳐들어가고 석가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눈을 뻔히 보고 바라보는 성인의 심정이 온 몸을 낱낱이 오리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지요.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오 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응생진한일러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날 신체를 마디마디 칼로 오린 것과 같은 아픔을 겪은 그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응당히 원망하고 분노하였을 것이다’ ‘내 마음은 텅 빈 상태에서 당신을 한 번 감화시켜보고 어떻게 하더라도 그 인과의 매듭을 풀어보려고 거기에 섰을 뿐이다.’라는 뜻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에 신도들이나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대적하여 싸웠을 것이라는 표현도 담겨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상이 아무것도 없어서 응생진한과 같은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지요. 대단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역사적으로 겪으신 사실이지요. 부처님 전생의 전설은 다음 대목에 나옵니다.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라
수보리야 우념과거생오백세에 작인욕선인하야 어이소세에 무아상하며 무인상하며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라
이 대목이 부처님의 과거 오백세 전에 인욕선인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설화입니다. 어떤 왕이 시녀들을 데리고 산보를 갔다가 점심을 먹고 곤히 잠이 들었는데, 그동안에 시녀들은 수행자에게 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이 화가 나서 이 수행자의 이름을 물었는데 인욕선인이라고 하자 칼을 가지고 인욕선인의 신체를 절절지해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생에 부처님이 인욕선인이어서 절절지해를 당했을 때도 ‘그때도 역시 나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은 應離一切相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시고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리일체상하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니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고 의미있게 살고 싶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베풀고 싶은 보살은 응당히 상을 떠나고 발심을 해라, 보리심을 발하라.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을 떠나는 것을 금강경에서는 가장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상을 떠나고 나서 비로소 발심하는 것이지요. 상이 있고서는 진정한 발심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처 : 염화실글쓴이 : 慧明華 원글보기메모 :'불교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3강-지경공덕분 제15 (0) 2014.11.05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2강-이상적멸분 제14(2) (0) 2014.11.05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10강-여법수지분 제13 (0) 2014.11.05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9강-무위복승분 제11/ 존중정교분 제12 (0) 2014.11.05 [스크랩] 금강경 강좌 제8강-장엄정토분 제10 (0) 201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