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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일주문
    불교 2013. 8. 21. 10:06

    일주문(一柱門)

    우리는 긴 여정을 지나왔습니다. 남섬부주에서 여덟 개의 바다를 건너고 일곱 개의 산을 넘어서 이제 겨우 수미산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나오는 동안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기운도 살펴보고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상(相)들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일주문(一柱門)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부처님 세상으로 들어가는 천 관문입니다. 이 문을 경계로 문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안을 진계(眞界)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살펴 다스리지 않으면 결코 일주문 앞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마음을 다스리지 않아도 일주문은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일주문은 단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일 뿐입니다.

      일주문(一柱門)의 한자(漢字)를 그대로 살펴보면 한 일(一), 기둥 주(柱), ‘하나의 기둥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기둥이 하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일주문이라고 하는지, 한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기둥이 하나이기 때문에 일주문이 아니라,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놓여 있기에 일주문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보통  집을 지으면 네 개의 기둥을 네 모서리에 두고 지붕을 올리는 데, 일주문은 일직선상에 네 개(또는 두 개)의 기둥을 두고 지붕을 올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주문이 부산 금정산 범어사 일주문입니다. 어떠한 보조물도 없이 네 개의 돌 기둥 위에 지붕이 있습니다. 지리산 쌍계사 일주문에는 재미있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두 개의 기둥 이외에 보조 기둥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일주문의 맛이 덜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기둥을 두고 지붕을 올린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심(一心)을 말합니다. 긴 여정을 통해 본인의 마음을 살핀 그 결과로 모든 분별된 마음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이 문을 통해 부처님께 다가가라는 의미입니다. 하심(下心)이나 일심(一心)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심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상(相)을 내려놓은 것이니, 그 마음에는 이렇다 저렇다 잘못된 분별이 없습니다. 이를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무심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있는 그대로 보는 한결같은 마음이니, 바로 일심(一心)입니다. 즉, 하심(下心)이 무심(無心)이고 무심(無心)이 일심(一心)입니다. 이러한 일심의 마음으로 우리는 일주문에서 합장 반배의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입니다.


    일주문에는 천왕문(天王門)이나 불이문(不二門)과 달리 문 중앙에 ‘천왕문(天王門)’, ‘不二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지 않습니다. ‘○○산 ○○사’라는 그 산사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예를 들면, ‘靈鷲山 通度寺(영축산 통도사)’, ‘伽倻山 海印寺(가야산 해인사)’, ‘曹溪山 大乘禪宗 松廣寺(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등입니다. 물론 일부는 ‘曹溪門(조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기도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 교화를 펼치신 육조 혜능 스님께서 머무신 마을이 조계(曹溪)였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조계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어받는 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시 한 번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살며 자신을 보게 됩니다. ‘入此門內 莫存知解(입차문내 막존지해)’가끔 일주문 기둥에 쓰여 있는 이 주련(柱聯)의 내용이 하심(下心)의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이 문에 들어서고자 하면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 알음알이(知解)란 세간의 분별과 시시비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일주문에는 그 사찰의 사격(寺格: 절집 안에서 그 사찰의 위치, 그 사찰의 자부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불보사찰인 통도사의 경우에는 ‘國之大刹 佛之宗家(국지대찰 불지종가: 나라의 큰 절이며, 불자들의 종갓집이다)’라고 되어 있고,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경우에는 일주문 뒷면에 ‘海東第一道場(해동제일도량)’이라고 되어 있고,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에는 ‘僧寶宗刹曹溪叢林(승보종찰조계총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편, 가끔 일주문에 있는 현판을 통해 역사를 알 수도 있습니다. 가령, 선암사의 경우 일주문 앞면에는 ‘曹溪山 仙巖寺(조계산 선암사)’라는 편액이 있지만, 일주문 뒷면에는 ‘淸涼山 海川寺(청량산 해천사)’라는 편액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옛날 절에 불이 많이 나기에 물과 관계되는 이름으로 산과 절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그래도 또 불이나자 다시 원래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일주문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수미산의 초입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 가르침을 맛보았다는 것뿐입니다. 마음이라는 놈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심원의마(心猿意馬)’라고 하였습니다.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가듯이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우리의 생각은 말처럼 밖으로 내달리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마음이라는 놈을 알기는 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굳이 지금 마음이라는 놈을 알기는 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굳이 지금 산사를 찾아 일주문 앞에 서 있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신행 생활을 하는 우리의 마음의 위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심이 있기에 여기까지 와서 일심으로 합장의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일단 그 놈을 잡아두기 위해서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여러 방편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복을 구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복을 이야기하고,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이야기하고, 삶의 고통을 풀고자 하는 이에게는 고통의 해결책을 이야기하고, 이런 동기 저런 동기를 헤아려 부처님께서는 여러 방편으로 하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법화경』의 중심교리인 회삼귀일(會三歸一)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성문승에 대한 가르침, 연각승에 대한 가르침, 보살승에 대한 가르침으로 방편을 써서 우둔한 중생을 이끈 뒤, 이제 하나의 가르침,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으로 나아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일불승(一佛乘), 일승(一乘)의 가르침이란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제 법당의 부처님이란 바로 내 안의 부처님을 말하며, 일주문을 지나는, 이 길은 바로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중에서

    출처 : 보리수 불교경전연구원
    글쓴이 : dlpul1010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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